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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형x석진x지민

패전국 외전









날이 밝았다.

 

전 날의 일이 무색할 만큼 다시 또 하루가 시작됐다. 고요한 담장 사이로 햇살이 들어왔고 그 새로 보이는 왕부는 분주해보였다. 어느 새 십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나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작년에 핀 꽃이 오늘 다시 피었고 어제 분 바람이 오늘도 불었다. 모든 게 달라져 있는 듯 했으나 그대로였으며, 그대로인 듯 했으나 달라져 있었다. 하나 둘 잠에서 깨는 이른 시간에 왕부의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누군가 재빠른 걸음으로 궁주의 처소로 들어갔다.

 





궁주님. 태친왕부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궁주라 불린 여성은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패어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매끈한 피부는 그녀의 지위를 나타냈으며 호선을 그리는 입가를 따라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세월의 선은 그녀의 성품을 나타냈다. 아침부터 이리 야단이냐며 궁주는 어린 시종을 탓했으나 노여움은 없었다. 시종은 소매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궁주에게 전했다. 궁주는 은으로 만들어진 지칼을 꺼내 밀봉된 봉투를 잘랐다. 안에는 곱게 접혀진 편지가 들어있었다.

 






증조 할머님께.

 

할머님, 강녕하신지요.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할머님께 너무 오랜만에 붓을 드는 것 같아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앞으로 더 자주 쓰도록 하겠습니다. 태친왕부에는 올해도 어김없이 황궁보다 먼저 꽃이 피었습니다. 할머님께서 계신 북쪽은 아직 꽃망울은 멀었을까요?

 

얼마 전 아버님의 십주기(十週忌)를 지냈습니다. 벌써 십 년이라니 시간이 참 빠릅니다. 이번에는 고모님들의 도움 없이 제가 스스로 준비하였답니다. 처음 제가 주관하였는데, 이것 저것 신경 쓸 것이 많은 탓인지 올해는 아버님 앞에서 울지 않았습니다. 고작 다섯 살 밖에 먹지 않았을 때지만 아직도 저는 전장으로 향하시는 아버님의 얼굴이 선명합니다. 항상 곧 돌아오겠다며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는데 그 날의 아버님은 그저 저를 안아주는 것이 다였습니다. 아버님도 어렴풋이 아셨던 걸까요, 당신이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 며칠 전에는 황궁에 입궁을 했었습니다. 저의 혼인 문제때문인데벌써 제 나이는 혼기가 꽉 찬 열 다섯인데, 황상께서는 저를 혼인시키실 생각이 없으신 듯합니다. 할머님께서 한번 황상께 여쭈어봐주실 수는 없는지요. 이래서 안 된다, 저래서 안 된다며 매번 퇴짜만 놓으십니다. 황궁과 왕부의 공주들 중 이 나이에 혼인하지 않은 공주는 저 뿐인데……. 어째 친 따님보다 저를 더 곁에 두려 하시는 것 같습니다. , 이 말은 못 본 것으로 해주세요.

 

이번 입궁 때는 재밌는 일이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제 할머님과 어린 시절의 아버님이 그리워 화청전에 들렸사온데 그곳에 황상께서 계셨습니다. 제 할머님이 돌아가신 후 비어있는 궁인데 왜 그곳에 황상께서 계셨을까요? 그것도 아무도 없는 침전에 계셨는데불경하옵게도 용루(龍淚:왕의 눈물)를 본 것 같기도 합니다. 소녀의 착각이겠지요? 제가 들어가니 후궁의 주인이신 황상께서 오히려 놀라시어 제가 더 몸둘 바를 모를 정도 였답니다


황상께서 계신 줄 모르고 들어가 혼날 줄 알았는데 그냥 저에게 이 곳에 가끔 오냐 물으셨습니다. 하여 그렇다 대답하자 그럼 이곳에 귀걸이 한 짝을 본 적 없냐 다시 물으시어 그렇다 대답하자 알겠다며 그대로 화청전을 나가셨습니다. 텅 빈 화청전에서 황상의 것을 잃어버리셔서 찾고 계셨던 걸까요? 혹시 소녀가 그것을 가져갔다 생각은 하지 않으시겠지요? 그런데 황상께서는 항상 귀걸이를 한 쪽만 하고 계신데 할머님은 그 연유를 아시는지요.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아 궁금해 황상께 여쭈어 봤더니 그저 웃으시기만 했습니다.

 

열흘 정도 시간이 흐르면 이제 북쪽에도 꽃이 만발하겠지요. 아버님과 매년 가던 할머님의 궁이 그립습니다. 이번에는 꼭 봄에 가 뒷 산에 만발한 꽃을 할머님과 함께 보고 싶습니다. 곧 갈테니 저를 기다려주셔요.

 

그러고 보니 할머님께 여쭈어 보고 싶은 것이 생각났습니다. 저번 겨울에 갔을 때 할머님의 궁에서 저보다 어린 사내 아이를 만났답니다. 그 곳에 제 나이 또래의 아이가 없는 것으로 아는데누군지 궁금했지만 곧 뛰어가 묻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그 아이의 얼굴이 눈에 아른거립니다. 이런 말을 하면 할머님께서 웃으실지 모르겠지만, 아버님의 어린 시절 초상화와 똑 닮아 있어서……


그 아이는 누구인가요?

 






궁주가 편지를 다 읽어갈 때쯤, 궁주의 처소로 사내와 열 살 정도 돼 보이는 어린아이가 들어왔다. 궁주는 익숙하다는 듯 자리를 마련해 그들을 앉히고 차 한잔을 내왔다. 밤새 평안 하셨냐고 묻는 사내의 물음에 궁주는 그저 웃었다. 어느새 동쪽 하늘 높이 떠오른 태양이 궁 안까지 빛을 비추었다. 그 빛에 반사돼 사내의 귀걸이가 반짝였다. 사내의 귀걸이는 양 쪽이 달랐는데,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평안하구나.”

 

새로운 하루의 시작이었다.













<후기>

패전국 그 뒤의 이야기 입니다. "딸은 어디갔냐는." 댓글을 써주셔서 모티브를 얻은 내용이기도 합니다ㅎㅎ 한시간 만에 빠르게 써내렸네요... 그만큼 짧지만요..(쭈굴


공주는 태형과 함께 환궁했지만 전장터에는 따라가지 않고 태친왕부에 남았습니다. 태친왕이 딸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만, 딸의 주변에는 고모와 이모들, 그리고 지민이 지켜줄 거라 생각했을 것 같아요. 태친왕이 딸을 두고 죽음을 택한 것은 단순히 석진만을 생각한 결정이 아니라, 석진 아니면 자신 둘 중 하나는 죽지 않으면 모두가 역적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석진과 딸 모두를 지킨 결정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지민은 태친왕이 그런 결정을 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중간 중간 암시했지만 둘은 어릴 때 사이가 좋았지만 선황의 황후와 귀비 사이의 총애때문에 멀어진 사이이고 또 적통의 지민보다 후궁 소생의 태친왕을 더 아낀 탓에 지민은 아마 어머니로부터의 압박과 아버지에 대한 갈망이 열등감으로 나타났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민이 태형에게 갖고있는 감정은 증오가 아니라 애증이라, 아마 지민은 다른 형제들은 모두 없앴지만 태친왕만은 그러지 못한 것이 愛때문이고, 하지만 홀로 남은 고통을 준 것이 憎이라 생각합니다. 석진에 대한 것도 태친왕에대한 우월심리와 호기심이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지민도 태친왕의 결정에 석진보다 더 크면 크지 적지않은 충격을 받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지민의 테마곡으로 고른 "네가 죽는 것도 보고싶어."는 사실 태친왕을 향한 것인데, 내 손으로 너를 죽일 수는 없지만 네가 죽는 것도 보고싶다는 지민이지만 한켠으로는 함께 늙어가고 싶은 마음이 은연중에 깔려있다고 생각합니다. 공주는 그때의 시간을 기억하지만 아마 석진에대한 것은 잊은 듯 합니다. 어린 시절에 잠깐 본 거라 잊었을 수도 있고, 어른들도 쉬쉬하니 어린 마음에 떠올리지 않으려 해 잊어버린 걸 수도 있고요. 평안하다. 그건 궁주 자신이 아니라 궁주가 본 석진의 지금 얼굴이겠지요.

항상 좋은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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