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본 수록 본문 및 외전입니다. 감사합니다.

본문
비번: 석진생일4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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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민side 마지막 밤
비번: 지민생일4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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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형side 첫날밤
성인인증/유료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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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블로그에 올라온 연재분보다 읽기 수월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맞춤법도 수정했고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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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소장본수록/유료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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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너를 알 수는 없지만 

너와 난 서로 많이 다르지만 

시간이 점점 흘러간 그만큼 

조금씩 이끌려 너에게 






뭐가 문제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상황도 완벽하고, 둘의 관계성 또한 이상이 없었다. 태형은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했지만 석진은 그게 되지가 않았다. 애초에 석진의 선택지에서 거절은 있을 수 없는 답안이었다. 태형이라서 더 그랬지만, 굳이 태형이 아니더라도 그랬다. 어릴 때부터 항상 선택은 석진의 몫이었고, 거절 또한 마땅히 석진의 것이었다. 괜히 심술이 났다. 원래도 태형이 8을 떠들면 석진의 2를 받아줘 완성되는 관계였지만 요즘은 태형이 8을 하면 석진은 0.5를 해 남은 1.5는 정적만이 흘렀다. 둘의 게이지에서 석진이 줄어들면 태형쪽에서 더 다가와 채워질 줄 알았는데 막상 그것도 아니었다. 석진은 그것도 불만이었다. 태형은 정말 자신이 할 정도만 선을 지켰다.

마사지도 그랬다. 그 뒤로 마사지는 매일 혹은 삼일에 한 번씩 했지만 그때처럼 긴장이 흐르지 않았다. 처음 마사지를 할 때는 말하지 않았어도 둘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있었다. 그 긴장감이 섹스 텐션인지 아니면 애정의 밀고 당기기인지, 그것마저 아니면 행위 자체의 긴장감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건 딱 한번 뿐이었다. 성의가 줄어든 것은 아니었지만 그저 마사지를 할 뿐, 다른 감정교류는 없었다. 포털 사이즈에서 찾아보면 부부사이의 마사지는 서로의 감정 교류를 원활하게 해 관계를 깊게 한다던데 전혀 그렇지 못했다. 진짜 부부는 아니지만 어쨌든 말이다.

회사에서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석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얼마 전 가입한 카페에 들어갔다. 오메가들이 모인 일조의 친목 카페였다. 그중에서도 석진은 결혼한 사람들이 있는 게시판을 눌렀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들어왔지만 첫 페이지부터 자신과 같은 고민들이 가득했다. 임신 중 권태기, 임신 중 관계없음. 임신으로 조금 예민해진 탓도 있었지만 석진의 자존심이 무너지기 충분했다. 진짜인가? 진짜 이게 바로 권태기인가? 하지만 둘은 권태기를 느낄 것도 뭣도 없었다. 뭐라도 했어야 권태기라도 오지, 둘은 연애든 뭐든 한 게 없었다. 감정 교류는커녕 시간과 장소만 교류하는데 그게 연애는 아니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상황은 카페의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심각해보였다. 저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고 연애한 다음에 결혼하기라도 했지, 자신들은 하룻밤 원나잇 스탠드에서 이어진 관계였다. 그것도 그냥 히트 사이클이라는 본능에 이끌려서! 석진은 책상 앞에 무너지듯 엎드렸다. 본능. 한참 생각하던 석진이 고개를 들어 다시 포털 사이트에 검색창을 켰다. 그래, 본능으로 시작한 관계면 한번 본능으로 가보자. 석진은 검색어를 바꿔 입력했다. 페로몬 띄어 쓰고 알파 띄어 쓰고 꼬시기. 이쯤 되니 오기가 생겼다.

태형 때문에 자존심이 상했으니 다시 회복할 방법 또한 태형으로 해야 했다. 석진은 몇 백 페이지에 이르는 검색 결과를 모두 정독했다. 이제 실전이었다. 일단 단둘이 있을 공간이 필요했다. 그건 쉬웠다. 항상 석진의 집에 함께 있는 둘이었고 태형이 자고 가는 것도 일상이었으니까. 인터넷에서는 그렇다면 이미 상황은 끝났다고 했지만 둘은 이미 그것이 일상이 된지 오래라 새롭지 못했다. 석진은 거기에 하나를 더 얹기로 했다. 바로 페로몬이었다. 함께 있긴 해도 서로를 유혹하거나 관계를 유도할 일도 없었으니 항상 페로몬을 갈무리하고 있는 둘이었다. 석진은 함께 돌아오는 차량 안에서부터 미세하게 페로몬을 흘렸다. 예민한 사람이 아니면 눈치 못 챌 정도긴 했지만 태형은 예민하기 그지없는 우성 알파였으니 전혀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중간에 한번 악셀과 브레이크를 헷갈렸겠지. 당황한 태형에 석진은 벌써 이긴 것 같았다. 거봐, 우리 관계에서는 내가 우위라니까. 그러나 그게 다였다.





항상 그렇듯 밥을 먹고 한 시간정도 흐르자 태형이 슬슬 마사지 준비를 했다. “할래요?” 하고 항상 석진의 의사를 묻는 태형이었다. 태형이 마사지 준비를 위해 손을 씻으러 가면 석진도 익숙하게 자세를 잡았다. 깨끗하게 손을 씻은 태형이 석진의 뒤로 가 앉아 그를 안았다. 꼭 맞붙은 자세였다. 그동안 그 묘한 긴장감은 없어진지 오래였는데, 오늘은 괜히 떨렸다. 석진이 웃옷을 올리자 태형의 손에 오일을 부어 손바닥을 비볐다. 손가락과 손바닥 사이로 오일 소리가 요란했다.



할게요.”



손이 석진보다 차가운 태형은 혹시라도 온도에 놀랄까 항상 먼저 말하고 시작했다. 첫날엔 영상을 따라 가슴까지 올라왔던 손이지만 그 이후로는 항상 배에만 머물렀다. 나른함에 솔솔 잠이 왔다. 배부르고 등 따신 상태로 마사지까지 받고 있으니까. 아니야, 안 돼. 석진은 자존심 회복을 위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항상 마사지를 받을 때는 두 눈을 감고 있었는데, (그러다 잠드는 게 일상이었다.) 이렇게 눈을 뜨니 태형의 얼굴이 참 가까웠다. 고작 마사지 하나일 뿐인데 거기에 집중해 미간에 힘을 준 태형이었다. 석진은 멍하니 태형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페로몬을 풀었다. 작정하고 푼 것은 아니라 강하진 않았지만 차에서의 것보다는 훨씬 진했다. 아까는 예민한 알파정도야 깨달을 정도였다면 지금은 어떤 알파가 맡아도 확신할 정도였다. 자신도 모르게 푼 페로몬에 석진도 놀랐지만 거기에 더 놀란 건 태형인 듯했다. 석진의 배를 문지르던 손이 멈췄다. 하필이면 옆구리 쪽을 만지던 손에 석진도 긴장해 도톰한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왜 그래요?”



아무렇지 않은 척, 모르는 척하고 태형을 떠보는 석진이다. 바로 바로 오는 태형의 반응이 즐거웠다. 귀엽기도 했고, 대놓고 자신을 신경 쓰고 있다는 행동과 표정이 뿌듯하기도 했다.



석진 씨, 지금.”

왜요?”



석진은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고작 페로몬뿐인데, 석진의 등 뒤에 딱딱하게 닿았다. 단단히 눌러오는 것에 석진은 속으로 웃었다. 아닌 척하더니만 태형은 자신에 페로몬 하나에 달아오르고 있었다. 우월감에 뿌듯하다 생각하는 석진이었지만 사실은 안도감이 드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에요.”



태형의 대답에 석진이 갈무리를 할 줄 몰라 억제제로 겨우 눌렀던 10대 때처럼 날카롭게 페로몬을 흘렸다. 이제는 단단하다 못해 아프기까지 했다. 석진이 자세를 바꾸는 척하며 몸을 뒤척였다. 비스듬히 누워있어 등에 닿았던 것이 엉덩이 쪽에 닿았다. 마찬가지로 등에 닿던 것이 엉덩이로 옮겨지자 태형이 더 눈에 띄게 반응했다. 그런 태형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기분이 좋아졌다. 석진이 여기까지 멍석을 깔아줬는데 안 그러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조금 심각할 지도 모른다. 태형의 발기부전을 심각하게 고민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아플 정도로 닿아오는 게 그건 전혀 아닐 테니, 만약 그렇다면 석진을 향한 태형의 마음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다 했어요.”

벌써요?”

그게 아니고, .”



앞만 바라보고 있던 태형이 시선을 떨궜다. 둘의 시선이 맞닿았고 얼굴은 숨결을 나눌 만큼 가까웠다. 둘은 한참동안 서로를 눈에 담았다. 이제 수순은 당연했다. 태형의 입술이 달싹이자 석진도 대답하듯 두 눈을 감았다.



이제 일어나요.”

?”

다 했으니까. 저 먼저 손만 씻을게요.”

…….”



이게 아닌데. 태형에게 기대던 석진의 몸에 힘이 빠지기 무섭게 태형이 화장실로 들어갔다. 차라리 샤워할게요, 하면 혼자 손으로 처리라도 하나 싶었는데 세면대 물소리만 들렸다. 그마저도 금방 나온 태형이었다.



뭐해요. 그렇게 누워있으면 침대에 오일 묻어요.”



잔소리까지 완벽했다. 뭐가 완벽했냐면, 석진의 자존심이 와장창 무너지기에 완벽했다.

 






V x JIN

샷건웨딩 shotgun wedding
 조금씩 천천히 너에게







[사랑해서 결혼하고 아이도 가지신 것이니 시간이 해결해줄 거예요.]

임신 2개월 만에 변했어요, 라는 글에 달린 댓글이었다. 대체 어떤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것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일단 전제부터 틀렸다. 사랑하지도 않았고 결혼을 하지도 않은 둘이었다. 그 다음만 맞아떨어졌는데 그렇다면 시간도 해결 못해주는 것 아닐까. 회사에서 업무는커녕 카페 글만 읽고 있는 석진이 다시 책상에 엎어졌다.



지민아.”

왜요.”

난 끝났어.”

뭘 또 끝나요.”

정말 끝났어. 12주 안에는 된다니까.”

뭐가 돼요.”

몰라, 끝났어.”



석진이 지민의 의자를 잡고 흔들었다. 덕분에 바퀴가 달린 의자에 지민이 흔들렸다. 대충 원인을 눈치 챈 지민은 석진에게 파일을 하나 넘겼다.



그럼 형이 갔다 오실래요?.”

뭔데.”

“4층 걔네 부서로 돌릴 교육확인서요.”



아마 둘의 반 동거 사실을 모르는 지민은 석진이 지금 태형을 한동안 보지 못해 이러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도 그럴게, 태형은 요즘 뭐가 그렇게 바쁜지 매번 지민의 약속을 거절했다. 평일에야 그렇다 쳐도 주말까지 바빠보였다. 하지만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도통 대답해주지 않는 태형이다.

석진은 지민이 내민 서류파일을 뚱한 얼굴로 쳐다봤다. 그때 얼마 전 읽었던 댓글이 생각났다. 장소를 바꾸면 신선한 장소가 주는 설렘이 권태기 해결에 도움을 준다는 짤막한 한 줄이. 석진은 냉큼 파일을 받아들고 4층 버튼을 눌렀다. 층이 다르니 업무가 겹쳐도 전화나 메신저가 다였다. 이렇게 직접 얼굴을 맞대는 것은 태형의 입사 초반 때 몇 번이 다였다. 그때는 신입 티가 확 났었는데 몇 개월 만에 회사의 분위기에 녹아있었다. 안경까지 쓰고 업무에 집중한 게 조금은 멋있기도 했다.



태형 씨.”



석진이 태형의 자리로 다가가 들고 있던 파일을 내려놨다. 파티션에 가려져 모니터에 집중하고 있던 태형이 석진의 얼굴에 조금 놀란 모양이었다.



여기는 왜.”



기뻐하진 못해도 반가워할 줄 알았는데 태형의 얼굴은 그저 당황만이 물들어있을 뿐이었다.



이거 주려고 왔어요.”

, 지민이가 올 줄 알았어요.”

…….”



둘 사이를 침묵이 감쌌다. 오히려 집에서보다 더 어색한 것 같았다. 석진의 기분이 추락했다. 충분히 구겨진 자존심에 석진은 오기를 부렸다. 보란 듯이 페로몬을 흘렸다.



석진 씨.”

.”

더 할 말있으세요?”

아니요.”



딱히 할 말이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석진의 대답에 태형이 손목을 잡았다.



그럼 이제 돌아가세요.”



그럼 커피 한잔이라도 하실래요? 정도는 기대한 석진이었다. 하지만 정작 귓가를 울린 말은 전혀 반대의 의미였다. 지금껏 거절당하긴 했지만 이렇게 말로 확고하게 선을 그은 것은 처음이었다. 석진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도망쳤다.



* * *



서러웠다. 퇴근하고도 수트를 벗고 씻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태형에게도 외출복으로는 절대 침대에 올라오지 못하게 했었는데, 수트를 입은 채로 침대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좋다더니, 사실은 그냥 아이 때문에 거짓말 하는 게 아닐까? 뭐가 문제인지 정말 모르겠어서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한참을 이불을 차고 있었는데, 마침 타이밍이 좋게 태형에게서 문자가 왔다. 아까 일을 말하려는 거 아닐까 싶었다. 회사라 그랬다고 한 마디만 해준다면 기분이 풀릴 것도 같았다. 아주, 아주 조금은. 약간의 기대감에 메시지를 확인했다.


[야근 때문에 너무 늦을 것 같아요. 오늘 못 갈 것 같으니까 냉장고에 있는 거 데워먹어요.] 

가뜩이나 홀로 돌아온 지하철에서 계속 서서와 기분도 안 좋았는데 태형의 문자 한통이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정말 야근 때문에 못 오는 걸까? 아니면. 석진은 오랜만에 지민에게 메시지를 넣었다.


[지민아, 오늘 김태형 야근해?]

아직 야근 중인 지민의 답장은 빨랐다.

[걔 방금 집에 갔어요.]



석진이 휴대폰을 던졌다. 침대에서 던져 액정은 괜찮았지만 마음은 전혀 괜찮지 못했다.

밥도 먹질 않았다. 냉장고에는 태형이 해놓은 음식이 있어 데우기만 하면 됐지만 입맛도 없었다. 결정적으로는 태형이 한 걸 먹고 싶지 않았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은 더더욱 막지 않았던 김석진이었다. 누구보다 우위에 있었고 절대 타인에게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술이라도 취할 때까지 흠뻑 마시고 싶었는데 그것도 되지 않았다.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다못해 카페인에 취할 수도 없었다. 석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잠이라도 청해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뿐이었다. 베개와 이불을 끌어안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온도의 방이었건만 너무나 춥고 서러웠다.

하지만 잠도 좋은 해답이 되질 못했다. 저녁도 먹지 않고 자기만 했더니 배고파 새벽에 결국 눈이 떠졌다. 석진은 비몽사몽 냉장고를 향해 태형이 해놓음 음식을 꺼냈다. 새우 카레. 석진이 좋아하는 메뉴였다. 전자렌지에 데워 식탁에 앉았다. 숟가락을 들고 좋아하는 새우 카레를 먹는데 한 술 입에 넣자마자 눈물이 뚝 떨어졌다. 정말 좋아하는 건데, 정말 맛있는 건데, 서러움이 밀려왔다. 도저히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아니 지금 필요한 건 이게 아니였다. 정말 좋아하는 거. 석진이 휴대폰을 들었다. 잠깐 동안의 통화 연결음이 초조했다. 안 받는 건 아니겠지. 그러나 곧 들리는 목소리에 석진은 목 놓아 울었다. 전화를 하자마자 우는 소리가 나니 전화 반대편의 사람이 더 놀란 눈치였다. 받자마자 들린 울음에 태형은 석진 씨? 하고 반복하며 상대를 확인했다.



왜 울어요.”



왜 우냐는 말에 서러움이 복받쳐 올랐다.



어디에요?”

.”

지금 바로 갈게요.”



전화는 거기서 끊겼다. 하지만 그래도 한번 터진 울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모든 상황이 서러웠다. 마시고 싶어도 마실 수 없는 술도 그랬고,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클럽도 그랬다. 하고 싶은 걸 할 수 없다는 게 너무 서러웠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서러운 건 역시 태형이었다.

바로 온다더니 태형은 30분이 넘도록 오지 않았다. 태형과 석진의 집은 차로 20분도 안 걸리는 위치였고, 지금은 새벽이니 이렇게 오래 걸릴 일도 아니었다. 귀찮아서 안 오는 것 아닐까? 그나마 멎었던 눈물이 다시 떨어졌다. 석진이 몸을 다시 침대에 눕혔다. 베개가 젖어 들어갔다.



석진 씨.”



눈앞이 흐렸다. 자신의 울음소리에 묻혀 도어락 열리는 걸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느새 방안으로 들어온 태형이 석진의 앞에 서있었다. 이제 자존심을 세울 기력이 없었다. 석진이 팔을 벌리자 태형은 몸을 숙이며 그의 앞에 앉았다. 그런데 도통 침대로 올라오지 않았다.



왜 안 올라와요.”

저 지금 회사에서 온 거라.”



아까 분명 퇴근했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어디 있다 온 건지 태형도 수트 차림 이었다. 그러고 보니 석진도 그랬다. 절대 외출복으로는 침대 위에 올라가지 않는 사람이란 걸 잘 아는 태형이 의아해했다.



왜 아직도 안 갈아입었어요. 어디 갔었어요?”

퇴근했다면서요.”



태형이 먼저 물었지만 석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회사에서 온 거 아니잖아요.”

회사에서 온 거예요.”

지민이가 퇴근했다고 했어요.”

잠깐 집에 USB 때문에 들렸던 것뿐이에요.”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태형이 석진의 손등을 문질렀다. 쓸데없는 다정함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왜 울어요.”

이제 내가 싫어요?”

?”



절대 묻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말이었다.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사실을 인정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내가 이제 더 이상 그렇게 보이지 않아요?”

그렇게라뇨?”

나랑.”



석진이 울음에 헐떡였다.



나랑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요?”

?”



꽤 놀란 모양이었다. 항상 저음이었던 태형의 목소리가 하이톤으로 솟아올랐다.



그날 왜 안 했어요?”

, 언제요?”

우리 처음 마사지 하던 날.”



석진의 말에 태형이 아. 하며 큰 눈동자를 굴렸다.



신경 쓰고 있었어요?”

안 쓰게 생겼어요?”



바닥에 앉아 있던 태형이 침대 위로 올라와 앉았다. 그리고 대답을 찾으려는 듯 떨군 시선이 흔들렸다.



변명거리 찾지 말고요.”

변명거리가 아니라,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생각하고 있어요.”

무슨 소리에요.”

그럼 다 일부러 한 거예요? 그 페로몬 흘리던 것도.”

…….”



태형의 물음에 석진이 아랫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려니 자존심이 상했다.



나는, 석진 씨가 우리 애 때문에페로몬 조절이 잘 안 되는 건 줄 알았어요. 그래서 나도.”

…….”

참았던 건데.”



천천히 감정을 정리하며 말하는 태형의 얼굴이 귀까지 달아올랐다.



그럼 회사에서도 일부러 그랬던 거예요?”

아니 그건 나한테 신경도 안 쓰길래.”

나는 괜히 이상하게 소문 퍼질까봐 더 그랬던 건데.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우리 부서에 알파는 나 혼자만이 아니라고요.”



석진의 손등을 문지르던 태형의 손이 그대로 깍지를 꼈다.



석진 씨 몸에 안 좋을 것 같아서, 그래서 그랬어요.”

괜찮대요.”

?”

그렇게 이것저것 알아보는 것 같더니만 정작 중요한 건 안 찾아봤어요? 다들 안정되면 하는 게 오히려 좋다고 하잖아요.”

. 미안해요.”

아니, 내가 지금 우리 애한테 좋다니까 하자는 게 아니고.”

알아요, 무슨 말인지.”



태형이 석진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너무 잘 알겠어요.”



한참 석진의 어깨에서 생각을 정리하던 태형이 고개를 틀었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단단한 팔이 석진을 더 깊게 안았다. 그의 페로몬을 흠뻑 마시는 것처럼 숨을 들이켰다.



오해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둘의 입술이 맞닿았다. 그저 맞닿을 뿐이었지만 심장은 크게 뛰었다. 아마도 태형에게도 들릴 것 같았다. 두 입술은 맞닿는 것이 전부였다. 질척이는 혀도, 부드러운 점막도 없었지만 어떤 것보다도 소중했다. 첫 키스 같았다. 지금까지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있잖아요, 석진 씨.”

.”

있잖아요.”



태형이 한참을 망설였다. 기다림이 조금 지쳐질 때 쯤 태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결혼 할래요?”



입술과 코끝이 맞닿은 채로 태형이 말했다. 예상하지 못한 말은 아니었지만 기대하지도 않았던 말이라, 석진의 귀 끝이 뜨거웠다.



생각해볼게요.”



마주한 대답은 아주 긍정의 뜻은 아니었지만 태형은 이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석진의 대답에 태형이 수트 재킷 안에서 잠깐 뭔가를 찾는 듯하더니, 곧 작은 상자를 꺼냈다. 상자 안에는 반지가 들어있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석진은 그만 혀를 깨물 뻔 했다. 상자에서 반지를 뺀 태형이 석진의 왼손 약지에 깊게 반지를 끼웠다.



언제 준비했어요?”

언젠가 건네줄 날이 오지 않을까 싶어서 항상 가지고 다녔어요.”

. 석진 씨가 스타벅스로 불러냈던 날?”



태형이 반지를 낀 석진의 약지 위에 입을 맞췄다.



그럼 할까요.”



이것도, 결혼도. 둘은 다시 입술을 맞췄다. 아까보다 깊게, 질척이게, 서로의 숨을 나눴다. 그러고 보니 내가 보일러를 올렸던가? 아니,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알게 뭐야, 이제 봄인데. 석진이 눈을 감아 태형을 더 깊게 안았다.


/샷건웨딩, .

 

 





 

많이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좋아하던 썰이라 이렇게 이을 수 있어서 재밌었어요. 제가 쓴 것중 제일 달달한 내용인 거같아요. 이제 수정하고 퇴고하고.. 마무리가 남았네요. 원래 이번편에는 조금씩천천히너에게를 넣고싶었는데 공식 뮤비도 피아노커버도 찾지못해 실패ㅠㅠ 위에 문구도 해당 노래의 가사에요! 혹시 가능하시다면 어플로 찾아서 들어봐주세요.. 정말 좋아하는 노래거든요...ㅎㅎ

그럼 이제 소장본에 들어갈 외전 작업하러..♥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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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거의 한곡반복 중인 노래.. (해당 영상 제공자는 s비s 공식으로 알아요 그게 아니라면 바로 내리겠습니다)













한파가 거듭되던 것도 잠시, 한 달 만에 날이 어느 정도 풀렸다. 영하의 기온은 영상으로 올라왔지만 초봄의 바람은 아직 매서웠다. 기온이 여전히 낮긴 하지만 이제 봄이라는 생각에 보일러를 껐는데 역시나 아직 겨울은 겨울이었다. 새벽의 한기에 석진이 잠에서 깨 너무나 익숙한 침대에서 일어나 보일러 온도를 높였다. 그리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역시 익숙하다는 듯, 옆자리에 자고 있는 남자를 깨웠다.



애 아빠.”

…….”

애가 자두 먹고 싶대요.”



한밤중에 깨운다면 조금은 인상을 쓸 만도 한데 남자는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갔다 올게요.”



태형 또한 익숙하게 겉옷을 챙기고 집을 나섰다. 어느새 서로가 서로에게 일상은 되고 습관이 됐다. 벌써 열 번도 넘은 새벽 외출이었다. 하지만 태형은 단 한번도 투정을 부리거나 짜증을 부린 적이 없었다.

새벽바람을 뚫고 양손에 자두를 가득 사온 태형은 당연한 수순처럼 도어락을 열고 비밀번호를 눌렀다. 이제 새벽에 과일을 사오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처음에는 1시간도 넘게 걸리던 일이었지만 차로 20분정도 떨어진 곳의 마트가 24시간 한다는 걸 알아낸 이후로는 더욱 그랬다. 새벽에는 차도 막히지 않고 마트에 사람도 없으니 더 빨리 갔다 올 수 있었다. 집안으로 들어와 두툼한 패딩을 벗자 따뜻한 공기가 태형을 감쌌다. 그리고 석진의 냄새가 났다. 같은 바디워시를 썼는데도 석진의 냄새는 좀 더 포근했다. 태형이 그새 잠든 석진의 옆에 앉았다. 곱게 감은 눈은 속눈썹이 부드러워 보였고 젤리처럼 도톰한 입술은 푹신해보였다. 정말 솜이불 같은 사람이었다. 석진의 주변 공기는 항상 따뜻했다. 체온도 높은 편이었지만 그를 둘러싼 분위기마저 그랬다. 그날 석진을 처음 봤을 때 자신의 눈썰미가 틀리지 않았던 것 같아 심장이 몽글몽글해졌다. 태형에게 석진은 그를 무장해제 시키고 그 안의 살갗을 품어주는 사람이었다. 매만진 석진의 볼이 말랑했다. 저 볼에,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저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옆에 있는 것도 그동안 태형이 간신히 이뤄낸 것이었다.



사왔어요.”



입술을 맞추는 것 대신, 손가락 끝으로 그의 볼을 맞췄다.



언제 왔어요?”

방금.”

아침에 먹을래. 태형 씨도 더 자요.”



석진이 태형의 팔을 끌어 당겼다. 잠에 취해 제대로 눈도 못 뜬 석진은 아직 꿈결인 듯했다. 막무가내로 당긴 탓에 태형은 석진의 위로 엎어져, 하마터면 입술이 닿을 뻔했다. 잠결이라 다행이다. 태형은 석진이 혹 눌릴까 팔꿈치로 몸을 지지했다. 그리고 석진의 얼굴을 살폈다. 이 높이에서, 이 각도에서 석진을 보는 것이 오랜만이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일지도 모른다. 서로의 페로몬에 취해 몸을 탐하기에만 바빠 석진의 얼굴을 눈에 담기 어려웠으니까. 태형은 천천히 몸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석진이 당긴 대로 그의 옆에 누웠다. 비스듬히 누운 자세는 꼭 석진이 태형의 품안에 안겨있는 모습이었다. 태형은 조심스레 석진의 머리 아래에 팔을 넣어 그의 어깨를 안았다. 둘의 관계는 누구보다 빠르게 시작됐지만 그 누구보다 천천히 이뤄졌다. 당장 입을 맞추지 못해도 좋았다.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주워진 시간에 눈을 감았다.


잠에서 먼저 깬 것은 석진이었다. 매번 새벽에 사들고 오는 태형을 그냥 보내기가 그래, 언제부턴가 자고 가라고 했던 일이 이제는 아예 같은 침대를 공유하는 사이가 됐다. 말이야 같은 침대를 공유한다 하지만 꽤 널적해 남자가 둘이 눕기에 충분했고, 때문에 이렇게 자고 일어났을 때 바로 얼굴을 맞댈 일이 없었다. 특별히 어떤 스킨십도 텐션도 없는, 그야말로 같이 잠을 잘 뿐인 사이라 창으로 들어오는 햇볕에 눈을 뜬 석진은 눈앞의 얼굴에 남았던 잠마저 확 달아났다. 어제 태형이 자두 사러 나간 이후로 기억이 없었다. 항상 그렇듯 기다리다 그대로 잠든 모양이었다. 마주한 둘 사이에는 조금의 틈도 없었다. 조금만 고개를 튼다면 코가 맞닿을 거리였다. 코는 물론 입술까지도, 어쩌면 태형의 속눈썹이 석진의 눈꺼풀을 간지럽힐지도 모른다. 게다가 태형의 품에 안겨있는 모습도 그랬다. 엉켜진 다리 때문에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이러다 태형이 잠에서 깬다면 그건 그것대로 부끄러웠다. 석진은 자신의 가슴을 감쌌다. 맞닿은 상체를 따라 쿵쿵 뛰는 심장소리가 전해질 것 같았다.



일어났어요?”



석진은 그야말로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엉켜있던 다리를 뺐다. 확 빼기도 이상해보여서 살살 밀면서 빼는데, 어째 석진만 신경 쓰이는 듯했다. 태형은 아무렇지 않은 사람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두 사왔어요. 먹을래요?”



언제 사와서 언제 씻어놨는지 자두들은 뽀득뽀득 닦여 그릇에 담겨있었다. 석진이 대답하자 태형이 쟁반채로 침대로 와 앉았다. 태형은 자두의 껍질을 벗겨냈다. 충분히 익어 물렁한 자두는 껍질을 벗겨내자 손에 즙이 흘러내렸다. 석진이 자기가 벗겨 먹겠다고 손을 뻗자 태형이 아, 하라며 자두의 과육을 입에 넣어줬다.



이미 내 손에 다 묻었는데 뭘 또 석진 씨까지 묻혀요. 그냥 먹어요.”



거절할 수 없어 꾹 다물었던 입을 벌렸다.



태형 씨는 안 먹어요?”

석진 씨 다 먹어요. 이거 하우스 자두라 비싼 거래요.”



태형은 자두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껍질 벗기는 일에 열중했다. 옆모습을 보고 있으니 속눈썹이 참 길었다. 윗 속눈썹도 그랬지만 아래까지 촘촘했다. 우리 아이가 태어난다면 태형의 속눈썹도 닮을까? 석진은 태형이 먹여주는 자두를 오물거리며 생각했다.



있잖아요, 태형 씨.”

.”

오늘 나 병원 가는 날이거든요.”

알아요. 11시 예약이잖아요.”

같이 갈래요?”

?”



태형의 딸꾹질이 다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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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오해는 사랑을 싣고





항상 가는 병원에 갈 뿐인데 태형은 본인 집에 들려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며 먼저 출발했다. 그냥 입고 온 대로 가도 될 텐데, 아는 사람은커녕 모두 처음 보는 사람이면서 누구에게 잘 보이고 싶은 건지 모를 일이었다. 본인이 굳이 그렇게 하겠다니 아무 말 안 했지만 말이다. 병원 앞에서 만난 태형은 아까 나갈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오히려 출근하는 것보다 더 차려입은 게 무슨 석진은 지금 우리가 상견례라도 가나 싶었다. 하지만 아차 싶어 입술을 깨물며 말을 삼켰다. 몇 번 오니 이제 아무렇지 않은 석진과 달리(사실 처음부터 아무렇지 않았지만) 태형은 병원 입구에서부터 표정이 굳어있었다.



손잡아도 돼요?”

왜요?”

조금 긴장 돼서요.”



태형이 석진에게 손을 펴보였다. 석진보다도 한 마디정도는 더 큰 손이었다. 절대 병원에 와서 긴장할 손이 아니었는데, 그 주인은 긴장된다니 조금 우스웠다. 아니 사실은, 조금 귀여웠다.



됐어요?”

.”



둘은 손을 꼭 맞잡고 문을 넘었다. 그 뒤는 별 것 없었다. 항상 했었던 진찰이었고 석진은 익숙하게 굴었지만 그 옆에서 태형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리고 같이 심장 소리를 들었을 때, 태형은 그만 그 자리에서 울고 말았다. 태형이 눈물만 뚝뚝 떨구고 있자 당황한 석진은 두 눈만 깜빡였다. 자신도 듣고 울지 않았는데 이제는 훌쩍이기까지 했다. 태형을 보고 의사선생님이 티슈를 건네며 웃으니 조금 부끄럽기도 했지만, 창피하지는 않았다. 병원을 나서고도 둘은 손을 꼭 맞잡고 있었다. 태형은 주차장으로 와서도 눈물이 그칠 줄을 몰랐다. 석진은 잡은 손을 꾹 누르며 태형을 달랬다.



왜 울어요.”

조금 놀라서요.”

놀랐어요?”

나한테 말 안 해줬잖아요.”

뭐가요.”

쌍둥이라는 거요.”



태형의 말에 석진의 머리가 순간 멍해졌다. 언젠가 날 잡고 말해줘야지, 해줘야지 하다 벌써 시간이 꽤 흘러있었다. 이게 뭐라고 약간의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 미루다보니 당연한 일처럼 잊어버린 석진이었다.



말하려고는 했는데.”

내가 더 매달릴까봐 그런 거예요? 일부러 말 안 해준 거예요?”

그건 아니에요.”



이제는 코끝까지 빨개진 태형이다. 석진이 그만 울라며 그의 등을 두드렸다. 차라리 제 차를 끌고 올 걸 하는 석진이다. 운전할 사람이 이렇게 우니 꼼짝없이 주차장에서 태형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은 죄도 있으니 할 말도 없었다.



그만 울어요.”

그럼 안아주세요.”

?”

사실 나 지금 자꾸 나쁜 방향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안아주면 안 그럴게요.”



태형은 석진이 일부러 숨겼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고 해도 변명이 될 뿐이니 석진은 말을 아꼈다. 석진이 손을 놓고 팔을 벌리려 하자 태형이 오히려 깍지를 끼며 손을 잡았다.



안아달라면서요?”

잡고 안을 수 있잖아요.”



어이가 없단 표정을 하며 석진이 태형의 어깨를 안았다. 연인들의 것과 달리 조금은 엉거주춤한 자세긴 했지만 둘은 주차장에서 한참을 안고 있었다. 태형의 눈물이 그칠 때까지, 그리고 석진의 두근거림이 잦아들 때까지.





* * *



 

오늘부터 마사지해요.”

뭘 해요?”

의사선생님이 그랬잖아요. 살이 틀 수 있으니까 매일 마사지 해주는 게 좋다고.”



이제 태형과 함께하는 주말은 일상이었다. 그렇다고 특별한 걸 하는 건 아니었다. 같은 공간에 있을 뿐 각자 책 읽고 게임하고 티비보고.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지만 그게 다였다. 뭔가를 함께하는 개념은 아니었다. 굳이 한다면, 밥을 함께 먹는 것. 그게 다였다. 그렇지만 함께 있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는 않았다. 조금은 단조로운 주말의 오후, 태형이 불쑥 가방에서 아로마 오일병을 꺼냈다.



나 살성 좋은데.”

해서 나쁠 건 없잖아요.”



태형은 태블릿으로 동영상까지 찾아가며 열심이었다. 간이 테이블에 태블릿을 올려놓은 태형이 석진을 침대에 앉혔다. 아무리 의사가 추천했다 해도 정말 할 줄은 몰랐는데, 일단 저렇게 열심히 하니 맞춰 줘야할 것 같았다. 태형을 울린 게 마음에 걸렸으니까. 석진이 아무 말 없이 따르자 태형은 양 손에 오일을 잔뜩 부었다. 방안은 라벤더 향으로 그득했다.



옷 위로 올려주세요.”



태형이 진지한 얼굴로 말하니 싫다고 할 수도 없었다. 석진은 침대에 바로 누워 니트를 위로 올렸다. 병원에서도 초음파를 위해 매번 하던 일인데도 자꾸만 니트 끝을 놓칠 뻔했다. 태형이 손가락 끝으로 영상을 재생했다.

[일단 마사지 받는 사람의 뒤로 가서 앉으세요.]

영상의 지시에 따라 태형이 석진의 뒤로 가 앉았다. 엉거주춤 누워있던 석진은 그 다음 순서를 기다렸다. 그리고 둘은 영상의 장면이 바꾸자마자 굳어버렸다. 다름 아닌 태형의 다리 사이에 석진이 앉아야 하는 자세였다. 마치 백허그 같은, 아니 태형에게 몸을 맡긴 채로 그에게 누워야하니 백허그보다도 더 했다. 첫 관계 이후 이렇다한 스킨십이 없었던 두 사람은 영상이 3분이나 지나갈 때까지 정적 속에서 서로의 눈치만 봤다.



이렇게하라는 거죠?”

? , .”



먼저 움직인 건 석진이었다. 누워 있던 석진이 태형의 앞에 앉았다. 그의 귀가 새빨갛다. 태형이 석진의 자리만큼 다리를 벌리자 그 사이로 기대왔다. 태형의 어깨에 석진의 뒷머리가, 가슴엔 그의 등이 닿았다. 둘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건만 영상은 어느새 저 혼자 10분쯤 재생되고 있었다.



안 해요?”

옷 좀.”



양 손에 오일이 잔뜩 묻은 태형이 허공에 손짓을 했다. 아까 올렸던 니트가 다시 배를 가리고 있었다. 힘이 없는 니트의 밑단은 손으로 잡지 않으면 자꾸만 말려 내려갔다. 석진이 니트의 아래를 잡아 올렸다. 자기 옷을 자기가 올리는 것인데도 석진은 꽤나 허둥댔다. 드러난 몸은 예쁘게 근육이 잡혀 있었다. 그때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밝은 빛 아래서 보니 또 다른 느낌이었다.



할게요.”

.”



이게 뭐라고. 둘은 무슨 의식이라도 치루는 사람들처럼 긴장해있었다. 태형의 손이 석진의 배를 감쌌다. 배꼽 주변을 엄지로 쓸고 양 손으로 둥글게 문질렀다. 손은 점점 위로 올라왔다. 배만 마사지하는 줄 알았는데 영상은 가슴까지도 이어졌다. 태형도 방금 막 찾은 영상이기에 하면서도 중간 중간 손이 멈칫했다. 태형이 그런데 석진은 더욱 죽을 맛이었다. 조금만 더 올려주세요. 태형의 말에 가슴까지 상의를 들어올렸다. 가슴이 드러나자 태형이 그 주변을 크게 문질렀다. 영상에 오메가 마사지라고 쓰여 있긴 했지만, 혹시 여성형 마사지는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가슴까지. 하지만 정적을 깨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침 삼키는 소리마저 크게 들릴 정도였다. 이때까지는 그래도 참을 만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손바닥으로 가슴을 문지르는데, 아까는 주변이었지만 이번에는 정확히 가슴 위였다. 오일에 젖은 손바닥이 유두를 문질렀다. 니트를 들어 올렸을 때부터 찬 공기에 바짝 선 유두였다. 딱히 가슴 애무를 받은 적은 없지만 그쪽이 꽤 예민한 석진이었다. 주변을 문지를 때는 괜찮았지만 직접적으로 유두에 자극이 오니 눈앞이 캄캄했다.



.”

아파요?”

아니, 아니에요.”



나른해 나온 신음에 오히려 놀라는 태형이었다. 괜찮다는 말에 태형이 다시 손이 움직였다. 스킨십도 스킨십이었지만 배 쪽보다는 가슴, 그것도 유두 쪽은 소리까지 자극적이었다. 가뜩이나 태형을 받아들이고 그의 페로몬에 약해진 석진이었다. 그런데 이런 자극까지 받으니 허리가 간지러웠다. 그리고 다른 곳도. 결국 석진은 두 눈을 꼭 감았다.



꽤 기네요.”

그러게요.”



영상에 집중한 태형은 석진의 표정이 어떤지 통 모르는 것 같았다. 드디어 유두에서 손이 떨어졌다. 살았다는 생각에 감고 있던 두 눈을 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약해져있는 옆구리를 쓸어내리며 얇은 허리가 태형의 손에 주물러졌다.



, 아읏!”



지금까지는 같이 영상을 보고 있던 탓에 그래도 그 다음 행동이 예측 갔는데, 두 눈을 감은 탓에 전혀 알지 못한 석진이다. 이렇게 허리를 쓸어내릴 줄이야. 알았더라면 이제 그만하자고 손을 잡았을 텐데. 마사지를 해주겠다며 아주 순수한 의도로 시작한 태형이었을 텐데 자신이 모두 망친 기분이었다. 아까야 나른함에 나온 신음인 척 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명백하게 흥분에 들뜬 신음이었다. 그리고 석진과 함께 밤을 보냈던 태형이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그걸 반증하듯, 소리와 함께 등 뒤가 딱딱해졌다.



이만하면 됐어요. , 씻고 올게요.”

, . . 저도 마저 할게요.”



석진이 퍼덕거리며 몸을 일으키자 태형도 함께 우왕좌왕하며 침대에 올려놓은 오일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흘린 오일을 마저 닦겠다는 건지, 아니면 뭘 마저 한다는 건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또 알아들은 사람처럼 석진은 그래요, 그럼하고 욕실로 도망치듯 뛰어 들어갔다.

큰 소리를 내며 닫힌 욕실 문을 따라 석진이 주저앉았다. 거울 속 모습이 엉망이었다. 상체는 오일로 번들거렸고 아래 또한 흠뻑 젖어있었다. 석진은 그대로 접시 물에 코를 박고 싶었다. 도저히 나가서 태형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 김석진 인생의 네 번째 흑역사가 갱신되는 순간이었다.

욕실에서 혼자 자책의 시간을 갖고 모든걸 씻고 나온 석진은 샤워가운의 끈으로 허리를 동여맸다. 이제 어떻게 태형을 볼 것인가. 거울 앞의 석진은 여러 가지 버전을 생각했다. 그 중 제일은 아무렇지 않은 척 묻는 일이었다. 하지만 석진이 아무 일도 없었던 척 해도 태형의 반응이 문제였다. 자신의 신음에 단번에 빳빳해진 태형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예상대로 흘러가려나. 석진은 세면대를 붙잡고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고개를 든 그는, 욕실 서랍 안쪽에서 콘돔을 꺼내 샤워 가운 주머니에 넣었다.


하지만 역시 인생사 새옹지마였다. 욕실에서 나와 석진이 맞은 현실은 욕실 안에서 했던 석진의 생각과는 많이 달라있었다.




간다고요?”

생각해보니 월요일까지 해야 할 걸 가져와서요.”

…….”



혼자 욕실에서 A부터 Z까지 예상안과 답을 만들었던 것이 허무했다. 태형은 혼자 말끔하게 옷을 입고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제 같이 퇴근하면서 당분간은 야근할 일 없다고 좋아하던 태형이었는데, 모든 상황이 갖춰졌는데 왜 피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좋다더니 그새 마음이 식었나? 하지만 같이 병원을 나와 펑펑 울었던 태형이었다. 그렇다면 마음은 진작 식었고 그냥 아이 때문에 나에게 이렇게 잘해주는 건가? 이제 나쁜 생각은 석진이 하고 있었다. 자꾸만 나쁘게 생각한다더니, 정말 태형이 그러고 있는 걸까 두렵기도 했다.



석진 씨도 어서 자요. 피곤하잖아요.”

…….”

석진 씨?”



석진이 한참을 태형만 바라봤다. 아니 노려보는 게 옳을 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내쳐진 기분이 들었다. 혼자 흥분하고 혼자 식은 몸이 차가웠다. 어쩌면 자신이 빨리 욕실에서 나오길 기다리고 있던 태형일지도 모른다. 그 나름의 최소한의 예의를 차리기 위해서.



그래요. 잘 가요.”

 







5편 나눠서 올립니다!

그리고 안개꽃(@u_shn_u)님께서 샷건웨딩 그려주셔서 함께 올려요. 안개꽃님 감사합니다♥

들이대는 태형이랑 석진이랑 너무 찰떡인 것.. 넘 예뻐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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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을 알고 난 뒤로 태형은 출근길에 석진을 매일 데리러왔다처음엔 자신도 차있다고 거절하려 했지만 아침에 운전을 하지 않아도 된다니 그건 좋았다아침엔 태형과 함께 출근하고 퇴근은 시외버스를 이용했다아침 시간엔 길이 너무 막혀서 이용할 수 없었지만 퇴근길에는 귀가시간이 정해져있는 것도 아니니 나쁘지 않았다.

태형과 함께하는 카풀을 한 지 2주정도 됐을까갑작스런 버스 회사의 파업이 터졌다버스는 괜찮지만 30분은 내내 서서올 퇴근길의 지옥철을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했다다시 운전대를 잡으면 됐지만 같이 하는 출근길에 꽤 익숙해진 때였다운전대를 잡지 않는 것에 익숙해진 것인지태형에 익숙해진 것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큰일이다.’

왜요?’



운전을 하던 태형이 물어왔다.



버스 회사 파업해서 퇴근 때 전철 타야할 것 같아서요.’

그럼 같이 퇴근해요.’

오늘 야근할 지도 모르는데.’

저도 그래요같이 가요.’



버스 회사의 파업은 사흘정도 더 이어졌다덕분에 석진은 태형의 차로 출퇴근을 하게 됐고 파업이 끝나고 나서도 습관처럼 함께 출퇴근을 했다하지만 그건 둘 다 야근이 있을 때 일이고석진이 먼저 퇴근하는 날이면 이렇게 야근을 마친 태형이 석진의 집으로 찾아왔다귀찮아석진은 오늘도 제 집 앞에서 서있는 태형을 보며 생각했다.



왜 왔어요.”

야식 먹자고요.”



석진에대해 아주 잘 아는 태형이었다항상 거절하지 않을 그럴 듯한 이유를 갔다댔다.



육회 좋아하죠.”



그것도 절대 거절할 수 없는 메뉴를 가지고.



이거 방금 광장시장에서 사온 거예요.”

어디 건데요.”

육회자매요.”

들어와요.”



그리고 결코 거절할 수 없는 곳이었다그다지 먹는 걸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은데 은근 맛집 지도란 말이야석진은 태형을 식탁으로 앉혔다태형이 사온 육회를 꺼내고 뭐 마실 거냐고 묻자 태형은 콜라를 선택했다.



병원은 가봤어요?”

내일 가보려고요.”

같이 갈까요?”

아니요.”



대답에 실망한 듯 태형이 고개를 떨궜다석진은 이런 태형의 반응이 조금 신기했다항상 무표정으로 뭔 말을 해도 예아니요만 대답하던 남자가 이렇게 감정표현이 풍부한 남자였나 싶었다석진은 태형이 사온 육회를 먹으며 이제 슬슬 꺼낼 주제에 대해 생각했다오늘은 무슨 말을 하려나귀찮기도 했지만 아-주 조금은 기대되기도 했다.



그런데요석진 씨.”

그래요듣고 있어요.”

아무리 시대가 100세 시대니 장수사회니 해도 그건 약물이나 의학적 시술 또는 수술로 생명을 연장하는 거래요그러니까 신체 나이는 그대로인데 의학이 발전해서 좀 더 연장을 시키는 거죠.”

그래서요.”

그러니까 연장 이전의 신체 나이는 그대로라 서른다섯이 넘어가면 노산으로 몸에 부담이 크대요.”

그런데요.”

그러니까젊으면 젊을 때 낳는 게 아이에게 좋대요최고로 건강한 유전자를 남기는 거죠지금 우리처럼요특히 정자는 그때그때 생성되는 거라 최소 3개월 전에는 몸 관리를 해야지만 한다던데저는 술도 담배도 안 하거든요그리고 매일 꾸준하게 운동도 하고 있고요.”

그렇군요.”

아니 이게 아닌데.”



태형은 젓가락만 손에 쥐고 육회를 먹기는커녕 콜라도 마시지 않고 사전에 달달 외우기라도 한 것처럼 줄줄 읊었다요즘 태형은 매일 이랬다일단 먹을 것그것도 정말 석진이 좋아하고 맛있는 걸 사와서 상황을 만들고 이런 저런 얘기로 설득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번에 말했던 거 말인데요.”

그건 됐다고 했잖아요.”

그치만 잘 생각해봐요.”



무슨 얘기인지 뻔한 레파토리에 석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 둘이 같이 살면 집세도 절약되잖아요.”

아니 내가 왜 같이 사냐고요.”

석진 씨는 자취한지 몇 년차예요?”

“6개월이요.”

저는 5년차거든요.”



태형이 뿌듯한 얼굴을 했다.



그래서 뭐요선배라고 불러줘요?”

그게 아니라 저 진-짜 잘하거든요빨래랑 청소랑 이런 거 저런 거 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랬다하루는 태형이 사온 야식으로 배부르고 등 따시니 알아서 있다 가라고 먼저 침대에 잠든 적이 있었다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화장실에 간 석진은 오버를 조금 보태서 그만 실명할 뻔했다귀찮아서 그대로 방치해둔 화장실 구석에 있는 곰팡이 청소와 타일의 실리콘 때가 모두 벗겨져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놀라서 어떻게 된 거냐 카톡을 하니 그냥요.’ 하는 답신 한 줄만 왔더랬다.



그건 그러네요편하겠네.”



처음으로 오는 긍정적인 반응에 태형의 두 눈이 그때의 화장실 바닥처럼 반짝였다.



그리고 이제 먹고 싶은 것도 많아질 거 아니에요그럼 새벽에 누가 가겠어요석진 씨가 혼자 나갈 거예요?”

배달의 민족.”



세상은 21세기스마트 코리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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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사라져 아니 사라지지 마

 



알람보다 먼저 울린 카톡 소리에 눈이 떠졌다석진은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손만 뻗어 머리맡에 올려둔 휴대폰을 잡았다시력이 나빠 안경이나 렌즈 없이는 잘 보이지 않은 석진은 부운 눈에 힘을 줘가며 메시지를 확인했다오랜만에 쓴 연차에 오전 내내 잘 생각이었던 늦잠을 방해한 건 태형이었다.



[오늘 병원 혼자 가요?]



피검사를 통해 간단히 확인 검사는 했지만 그 이후로 병원에 간 적이 없어 어떤 선택을 하던 한 번 더 가긴 가야할 것 같아 연차를 쓴 석진이었다어제 퇴근 하는 차에서 혼잣말하듯 병원 얘기를 꺼냈는데그새 기억한 태형의 문자였다그럼 혼자 가지누구랑 가냐석진은 속으로 답장을 보냈다.

다시 잠에서 깼을 땐 해가 중천이었다씻기도 귀찮아 모자와 마스크를 푹 눌러썼다그리고 그때 전화가 울렸다역시나 태형이었다지금 나가려는 걸 어떻게 알기라도 한 건지 타이밍도 좋았다혹시 어디 카메라라도 설치 해놓은 거 아니야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전화를 받았다.



왜 답장이 없어요.”

못 봤어요.”

어디 아픈 줄 알았어요.”

어제 건강한 거 봤잖아요.”

오늘은 아플 수 있잖아요.”



낯간지러운 관심에 석진은 모자를 더 깊게 눌러썼다.



뭐라고 물어 봤는데요.”

저 오후반차 썼어요.”

왜요.”



그의 의도가 너무 빤해 석진은 어미를 내렸다절대 의문문이 아니었다그저 너가 거길 왜 가냐 정도의 의미였다.



그냥 혼자 갔다 올 거예요별 것도 아니고.”



석진의 말에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삐진 걸까아니면 화난 걸까표정을 알 수 없으니 답답했다그리고 거기에 짜증이 났다사실 태형이 삐지든 화나든 석진과는 그닥 상관이 없었다그냥 끊자고 하면 끝날 인인데 태형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 답답하게 여겨지다니그에게 하나 둘 감정이 써지는 제가 짜증이 났다.



집 비밀번호 알려줄 수 있어요?”

왜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석진이 놀란 토끼처럼 말꼬리를 올렸다.



갔다 오면 같이 밥 먹고 싶어서장보고 가서 준비하고 있으려고요.”

…….”



다행히 삐지진 않았나보다근데 이걸 다행이라 여기고 있다니갑자기 태형의 감정에 같이 휩쓸리는 자신이 낯설었다고작 몇 주 새에 태형에게 길들여진 기분이 들었다. ‘됐어요.’ 라는 말이 입안에 맴돌았다내뱉기만 하면 되는데자꾸만 혀끝에 걸쳐졌다.



카톡으로 보낼게요.”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찹쌀 채운 백숙이요.”

백숙이요?”

먹고 싶은 거 말하라면서요.”

알겠어요.”



태형이 침울해져 전화를 끊자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태형에게 이끌려가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는데 다시 주도권을 잡은 것 같았다.

사실 석진은 알파라는 인종을 좋아하지 않았다알파 자체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 본능이니 운명이니 하는 것이 싫었다결정적으로 싫어진 이유는 좋아하던 베타에게 넌 오메가잖아.”하는 대답을 받았을 때였다너는 성격이 별로야 혹은 외모가 별로야 하는 이유라면 충분히 받아들였을 텐데단순히 오메가라 안 된다고 거절당하니 수치스러웠다마치 너는 지금 착각하고 있어내가 아무리 좋아도 알파가 나타나면 그 페로몬에 홀릴 거잖아.’라며 그동안 좋아했던 마음이 모두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오메가이고 싶어서 오메가로 태어난 것이 아니었고 좋아하는 마음 또한 진짜였는데 너무 억울했다마음이 부정당한다고 생각해 더욱 알파는 만나지 않았다페로몬에 감정이 조정당하는 게 싫었다가끔 알파에게 고백을 받더라도 내가 좋은 게 아니잖아오메가라 좋은 거지.’하며 거절하던 석진이었다.

아이를 낳는다는 것 자체는 크게 나쁘지 않았다굳이 결혼을 하지 않아도베타와 달리 인종 수가 적은 오메가와 알파는 아이가 생긴다면 혼인여부에 불문하고 낳는 것이 통상적이었다사회에서도 그걸 당연하게 여겼고베타보다 타고난 조건 또한 우월했기에 오히려 더 유도하기도 했다때문에 알파와 오메가 중에는 미혼모나 미혼부도 많았다그렇게 교육받고 자랐고또 그걸 본능으로 생각하는 인종이니 사회적인 억압이나 색안경 따위도 없었다오히려 일반적인 알파나 오메가의 입장에서 지금의 석진은 조금 유별나게 보일지도 모른다오메가와 알파의 만남은 운명이었다세계가 만들어 지고 난 이후부터 그것이 정설이었다운명을 거부하는 건 바보 같은 일이라 여겼다.

하지만 석진은 운명이라는 건 자신이 원치 않았던 일을 합리화할 때나 쓰는 말이라 생각했다운명이 아니라 실수라고 상황을 비틀었다그래서 더욱 거부했다그가 알파니까그게 본능이니까 하는 건 너무나 스스로가 짐승처럼 느껴졌다태형과 있다면 자신의 감정이 모두 부정당할 것 같았다이성적인 사고와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 모두 역시나.’하는 것으로 비춰질 것 같았다본능에 가려져 마음이 왜곡 당하는 것이 싫었다어쩌면 두려울 지도 모른다그렇기에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었는데태형과 있으면 자꾸만 그에게 끌려가는 기분이 들었다우스운 것은 이상하게도 싫지만은 않았다.

이런 저런 잡생각에 사로잡혀 20분이면 도착할 병원을 30분이 넘겨서야 겨우 도착한 석진이다병원에 도착하자 당연한 수순처럼 초음파 검사가 이뤄졌다베드에 눕자 차가운 젤이 배에 발라졌다저번에 피검사를 할 때는 아무 느낌이 안 났는데 이렇게 젤이 배 위에 발려지고 모니터에 화면이 들어오자 실감이 났다긴장감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이런 기분도 오랜만이라 낯설었다하지만 역시 나쁘지 않았다.



.”



석진은 받아쓰기 검사를 받던 그때처럼 의사의 말 한마디를 조용히 기다렸다.



아기집이 두 개네요난황도 두 개고요.”

?”

조금 더 지켜봐야할 것 같지만이란성 쌍둥이 같네요축하드립니다.”



의사는 모니터를 가리키며 석진에게 설명을 했다하나도 아니고 둘이라니갑작스런 상황에 석진은 어안이 벙벙했다. ‘젊으면 젊을 때 낳는 게 아이에게 좋대요지금 우리처럼요.’ 그때는 태형의 말이 자신을 구슬리려고 그냥 한 말이라 생각했는데진짜 그렇긴 그렀나보다며 태형이 없는 곳에서 태형에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지만 조금 당황스러웠다.



다음에 오시면 심장소리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요같이 오세요.”



별 것 아닌 인사치례에 석진의 대답은 한참 걸렸다그 뒤 의사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어느새 검사는 끝나고 의사 옆에 있던 간호사가 석진의 배에 젤을 닦아주며 어색한 공기를 달래듯 말을 건넸다.



베타 부부사이에선 쌍둥이가 흔해도 오메가와 알파사이에선 흔하지 않은데두 분이 정말 운명이신가보네요.”



일종의 립 서비스겠지만 석진은 의례적인 말을 되짚었다운명아니석진은 선택한 것이다알파의 페로몬이 아닌 김태형을.

갑작스런 상황에 넋이 나가 어떻게 집으로 온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신 차라니 현관문이 눈에 들어왔다. 고작 병원 하나 갔다 왔을 뿐인데 너무나 피곤하고배고팠다빨리 뭐라도 먹고 한숨 더 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도어락을 열던 석진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분명 태형이 집에 있을 텐데벨을 눌러야할지 아니면 그냥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야 할지 망설여졌다뻔히 안에 사람이 있는걸 아는데 비밀번호를 누르기도 그랬고 자신의 집인데 손님처럼 벨을 눌리기도 그랬다어떡하지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석진이었다이런 고민하는 스스로가 우스웠다그렇게 신경 안 쓴다고 하더니 태형보다 더 태형을 신경 쓰는 석진이었다순수하게 상황이 우스워 웃음이 났다그러고 보니 이렇게 웃는 것도 꽤 오랜만이었다또 누군가 때문에 이런 고민하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결정을 내린 석진은 초인종을 눌렀다생각지도 못한 초인종에 석진보다 안에 있는 사람이 더 놀랐는지 무언가를 떨어뜨리는 소리가 크게 났다.



다녀오셨어요.”



그리고 현관이 열렸다태형이 있는 건 당연히 알았지만 차림새는 생각하지 못했던 탓에 석진은 그대로 웃음을 터트렸다단정하게 빗어진 머리에 목까지 꽉 조인 넥타이수트 팬츠 그리고 그 위에 노란색 병아리 앞치마.



어디서 난 앞치마래.”

이거.”



그제야 수트에 앞치마를 메고 있는 자신을 내려다본 태형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오기 전에 벗으려고 했는데갑자기 초인종이 눌려서……저희 집에서 가지고 왔어요백숙 먹고 싶다고 했잖아요압력솥이 없을 것 같아서 들렸다가 나오면서 챙겨온 건데이거 그냥 세일하는 거제일 싼 거로 산 거라 디자인이 이렇다고요.”



민망한지 태형의 말이 길었다변명하듯 입술이 쫑알대는 게 정말 병아리 같았다.



집에 압력솥도 있어요?”

전기밥솥 사기전에 잠깐 쓰던 거예요.”



석진은 자연스럽게 대화의 방향을 바꿨다그러자 태형의 얼굴에 민망함이 좀 가시어졌다이렇게 얼굴에 금방 드러나는 남자가 어떻게 그렇게 무뚝뚝했을까 신기했다.

태형은 석진을 식탁에 앉혔다커다란 대접에 담겨 나온 백숙은 정말 파는 것처럼 보였다안에는 석진이 말한 대로 찹쌀이 가득 들어있었다삶기도 잘 삶았는지 닭다리가 젓가락에 부드럽게 떨어졌다제일 좋아하는 다리부분을 뜯어 소금에 찍었다푹 익은 살점이 녹아내렸다국물도 맛있었다아마 저 압력솥과 병아리 앞치마를 못 봤다면 어디서 사온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안 먹어요?”



그런데 정작 태형은 먹지 않고 있었다석진이 다시 한 점을 소금에 찍으며 물었다만든 사람은 먹지도 않는데 혼자 앉아 먹고 있는 게 조금 민망했다그리고 옆에 앉아 먹고 있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도.



저 배불러요만들면서 하도 주워 먹었더니.”



백숙을 만들면서 뭘 주워 먹었다는 걸까생닭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태형의 배속에서 꼬르륵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이랬던 적이 있었다멀리서 육회까지 사온 태형이었는데 정작 먹은 건 석진 혼자였다그때는 그냥 그러려니 싶었다아니 사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안 먹으면 내가 다 먹으면 되지 뭐오히려 더 잘됐다고 생각했었다그런데 지금은 태형이 먹지 않는 게 왜 이렇게 신경 쓰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사실 안 좋아해요저 입맛이 은근 어린애 입맛이라삶은 거보다 튀긴 거 좋아해서.”

그럼 육회도 안 좋아하겠네요.”

.”

좋아하지도 않는 걸 사와서 같이 야식먹자고 한 거예요?”

석진 씨가 좋아하잖아요특히 거기 꺼 좋아한다고.”

내가 말해줬었어요?”

아뇨사실지민이한테 물어봤어요석진 씨 뭐 좋아하냐고.”



태형이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다행이었다하마터면 분명 달아올라 있을 얼굴을 들킬 뻔 했다태형은 설거지 하겠으니 마저 드시라며 자리를 일어났다아직도 벗지 않은 병아리 앞치마의 뒤에는 예쁘게 리본이 묶어져있었다큰 손으로 저 작은 리본을 묶었을 생각하니조금은……석진이 뒤돌아 설거지하고 있는 태형에게 말했다.



다음에는 나한테 직접 물어봐요.”



어쩌면 물소리에 묻힐지도 모를 만큼 작았지만태형은 끄덕였다.

 



* * *

 



밥만 같이 먹자더니태형은 정말 밥만 같이 먹고 집으로 돌아갔다사실 석진 혼자 먹은 거라 저녁은 태형이 좋아하는 걸 같이 먹을 생각이었는데 자기가 먼저 간다니 잡을 수도 없었다잡을 수야 있었지만태형을 보내고 배도 부르겠다병원 일이 꽤나 피곤했던지라 금세 잠들었다.

푹 잠들었다 생각한 것도 잠시 석진은 잠을 뒤척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일어나자마자 시간을 확인했다새벽 3잠깐 자고 저녁을 먹을 생각이었는데 낮잠이 아니라 아예 푹 자버린 석진이다저녁도 먹지 않고 잤더니 허기가 졌다잠깐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빠진 석진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지금은 밥이 먹고 싶지 않았다.

달게 자던 석진이 일어난 이유는 다름 아닌 딸기 때문이었다꿈에 병아리 앞치마를 입은 딸기가 뛰어다녔는데 그 때문인지 밥보다도 딸기가 먹고 싶어졌다하지만 시간은 새벽3과일을 파는 곳이 마땅치가 않았다바나나 정도야 편의점에서 팔기도 하지만 새벽에 딸기는 찾기 어려웠다하지만 쉽게 포기가 안됐다포기하고 다시 자려고 하는데 자꾸만 입안에 딸기 맛이 돌았다아무래도 안 되겠다생선회도 커피도 배달되는 시대인데 과일 배달하는 곳도 있지 않을까스마트 폰을 켜 배달의 민족 어플을 뒤지던 그때며칠 전 태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제 먹고 싶은 것도 많아질 거 아니에요그럼 새벽에 누가 가겠어요석진 씨가 혼자 나갈 거예요?’

사실 나간다면 혼자 나가도 되지만이미 통화 연결음은 울리고 있었다.



자요?”

안자요.”



시간이 시간인 지라 안 받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전화는 금방 받아졌다하지만 안 잔다는 말은 누가 들어도 거짓말이었다태형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배는 낮았다.



딸기.”

?”

딸기가 먹고 싶어서 전화했어요.”

…….”

그냥아니에요.”



수화기 너머로 말이 없다아마 시간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어쩌면 이 시간에 딸기를 어디서 구하냐고 속으로 욕할 지도 모를 일이었다.



금방 갈게요.”




* * *


 

금방 간다던 대답은 짧았지만그 이후로 태형은 한 시간이 넘도록 연락이 없었다못 구한건지다시 잠든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커피 물까지 올려놓은 석진은 무릎을 안은 채 휴대폰이 울리기만을 기다렸다연락이라도 한번 해봐야 하는 걸까그렇지만 전화를 하면 꼭 보채는 것 같아 할 수가 없었다역시 그냥 혼자 나갈 걸태형이 가는 곳이면 석진도 갈 수 있었다괜한 일을 시킨 것 같아 조금 미안함이 몰려올 때초인종이 울렸다조금의 망설임도 없이태형만 기다리고 있던 게 조금 티 났지만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석진은 초인종 소리가 끊기기 전에 문을 열었다.



딸기 사왔어요.”



해가 떴을 때 이 집을 나섰던 태형은달이 뜨고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돌아왔다현관문을 열자 검정 봉투를 들고 꽤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석진을 반겼다볼이 새벽바람에 얼어 꼭 딸기 같았다딸기를 사 오랬더니 자기가 딸기가 돼서 온 태형이었다.

석진은 꿈에 나타난 딸기가 누군지 깨달았다병아리 앞치마의 딸기석진은 현관을 잡은 채로 주저앉아 새벽의 빌라가 떠나가도록 웃었다눈꼬리에 눈물까지 매달고 웃는 석진에 당황한 태형이 왜 그러냐며 같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왜 그래요무슨 일 있어요?”



큰일이었다너무 귀여웠다.








너무 졸려서 수정 부분을 못찾겠어요..일단 올리고 잘래요...

브금은 정식 음원은 아니고 아ㄹ1아네1집에 들어갈뻔한 노래였다고 해요 데모 테이프같은건데.. 

노래 너무 귀여워요.. 가사도 너무 귀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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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안 돼.”



편지 한 통이 석진의 직장으로 날라 왔다. 본인 외에는 절대 개봉 불가하다는 경고가 쓰인 서류봉투에 담긴 등기. 일주일 전 병원에서 기본 건강검진과 함께 임신 여부를 검사했던 결과지였다. 갈색 서류봉투를 들고 화장실 제일 끝 칸으로 들어갔다. 종이 한 장의 무게였지만 왜 이리 무거운지 자꾸만 놓칠 뻔한 석진이다. 문을 잠그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저 오늘부터 교회 제대로 갈게요. 매년 송구영신예배만 갔지만, 이번 주부터는 매 주 헌금도 제대로 낼게요. 손으로 봉투 안에 결과지를 천천히 꺼내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제발, 제발!

석진은 결과지를 찢어 갈기갈기 변기에 내렸다. 그 옛날, 시험을 망쳤던 그때처럼. 아무래도 종교를 바꿔야할 것 같았다.

자리로 돌아온 석진은 하던 업무를 마저 하기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아보였다. 평소와 다름없다 여기며 석진은 엔터를 쳤다. 다만 평소와 다른 것이 있다면, 뻔히 easy cut 이라고 쓰여 있는 믹스커피를 반대로 뜯어 봉투가 터졌다던가, 이면지를 반대로 넣고 100부를 복사했다던가, 본인 싸인은 넣지도 않은 채 교육 이수 자료를 돌렸다던가 하는 일이었다. 상황이 이쯤 되니 석진의 컨디션이 평소와 다르다는 건 석진 빼고 12층의 모두가 알았다.



, 무슨 일이에요?”

? 아니.”

근데 오늘 왜 그래요. 몸이 안 좋아요?”



몸이야 너무 좋지. 너무 좋으니까 그렇게 원 샷 원 킬로 끝났겠지. 석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냐.”

그럼 끝나고 같이 맥주 한 잔 할래요?”

아니, 괜찮아. 신경 써줘서 고마워.”



평소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던 석진이다. 제안을 듣고 1초정도는 갈까 싶었지만 왠지 그러겠노라 할 수가 없었다. 아직 부풀기는커녕 조짐조차 없는 마른 배에 손을 올렸다. 진짜 싫다. 그대로 엎드려 책상에 볼을 부볐다. 너를 어떡하면 좋지.

하지만 혼자 삽질해봤자 나아지는 것도 없었다. 이번 주는 풀야근을 하려고 했지만 도저히 업무에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될 대로 되라지. 석진은 퇴근하는 지민을 돌려 세웠다.

한 잔 하러 가자.” 싫다고 했을 땐 언제고 그새 마음을 바꾼 석진에 지민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사수의 결정에 토를 달아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아는 지민이었다. 다행히 저녁 약속도 없는 날이라 지민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갈지 고민할 필요도 없이 둘은 항상 가던 오뎅바로 향했다. 월요일부터 술을 마시는 사람은 적었기에 평소보다 한적했다.



여기 생맥 하나 주세요.”

하나요?”

난 안 마셔.”



먼저 맥주를 마시러 가자고 한 사람은 분명 석진인데 마시지 않겠다니, 지민이 당황해 되물었다.



아니, 못 마셔.”



같이 마시자더니 그냥 지민 혼자 마시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뭐야, 이 형. 아니 술이라도 안 마실 거면 얘기라도 하던지 오뎅 꼬치 하나들고 멍하니 바라보며 고사만 지내고 있는 석진이다. 김석진이 오뎅을 들고도 먹지 않다니. 오늘 회사에서도 그렇고 분명 뭔가가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형 어디 아파요?”

아니.”

그럼 뭐 있어요?”



뭐가 있냐고? 있기야 있지. 지금 내 배 안에 있지.



왜요, 뭔데요.”

아니 그게.”

큰일이에요?”



큰일이지 그럼, 큰일이고말고. 석진은 한 입도 베어 물지 않은 오뎅을 내려놨다. 그러자 지민의 표정이 더 심각하게 굳어갔다. 그 김석진이, 그렇게 좋아하던, 심지어 이 오뎅바에서 제일 좋아하는 치즈오뎅을 들고도, (하나밖에 남지 않아 지민은 못 먹었다.) 먹지 않고 그대로 내려놓다니! 아무래도 예삿일이 아니었다.



왜 그래요, .”

지민아 나.”

, 말해 봐요. 제가 들어줄게요.”



, 우리 지민이 너무 착해. 석진은 괜히 울컥하는 마음에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이렇게 감정변화가 격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오늘따라 변덕이 심한 석진이다. 아이가 생겼다고 호르몬의 영향을 받는 걸까. 하지만 아직 2주밖에 안된 세포일 뿐인데. 에라, 모르겠다. 석진은 두 눈을 꼭 감고 질러버렸다. 기쁜 일은 나늘수록 배가 되고, 고민은 나눌수록 줄어드는 법이다.



나 임신이래.”

뭐요?”

임신.”

제가 지금 잘못들은 거 아니죠? 임신이라뇨?”



석진이 오메가인 걸 모르는 건 아니니 임신했다는 자체에는 크게 놀랄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민이 알기로는 석진은 지금 만나는 사람커녕 썸 타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임신이라니? 대체 누구랑, 어디서, 언제, 무엇을, 어떻게, ?



형 지금 만나는 사람 있어요?”



석진이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도 알아요?”

아니, 근데 난 낳을 생각 없어.”



설마설마 하던 게 맞아떨어지니 지민은 절로 한숨이 쉬어졌다. 반 정도 남은 맥주잔을 들어 그대로 들이켰다.



난 김태형이랑 결혼할 생각도 없고, 혼자 애 키울 생각도 없어.”

? 태형이요?”

…….”

형 김태형이랑 잤어요?”



아까부터 오뎅 하나 들고 김태형, 세 글자만 생각하고 있던 석진이었다. 임신 사실을 말해도 그 상대에 대해서는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저도 모르게 저질러버린 실수에 입을 가렸다. 당황한 석진의 얼굴에 지민이 와. 하며 맥주 한 잔을 더 시켰다. 그리고 단숨에 반을 들이 키고 나서야 조금 진정이 된 모양이었다.



김태형 그 미친놈은.”



당장이라도 태형에게 전화해 뭐라 할 기세로 휴대폰을 꺼내자 석진이 손을 뻗어 하지 말라며 지민을 제지했다.



아니 어떤 미친놈이 원나잇에 피임도 안 해요!”

, 내가 하지 말자고 했어!”



석진이 낮은 목소리에 힘을 줬다.



히트 사이클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고.”

아니 혀엉.”



지민이 두 눈을 감은 채로 깊게 한숨을 쉬었다. 지민은 한참 동안 감은 눈을 뜨지 않았고, 석진은 아까 내려놨던 치즈 오뎅을 조금씩 먹으며 지민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도 태형이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

어쨌든 둘의 아이잖아요.”

그치만 김태형은 날 싫어하잖아.”



의아함에 지민의 이마가 구겨졌다.



태형이가 형을 싫어한다고요?”

.”

어느 대목에서 그렇게 느꼈어요?”

나 걔랑 업무 외에 얘기 해본 적 없는데. 그리고 되게 딱딱하게 굴어.”

아니 그건 형이.”



존나 별로라고 하니까 얘가 삐진 거잖아요. 지민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가 말하지 않았는데 자신이 하는 건 아닌 것 같아 말을 아꼈다.



어쨌든, 낳든 안 낳든 태형이도 아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그래.”

약물을 하든, 뭘 하든 보호자도 있어야 하잖아요.”

그건 너가 있잖아.”

그렇긴 한데. 그래도 당사자는 알아야죠, ?”



지민이 두 눈을 깜빡이며 석진을 달랬다. 둘의 실수였으니 혼자 묻는 건 역시 아닌 걸까. 석진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어.”



* * *

 


석진은 집에 돌아와 피곤했던 흔적을 모두 씻어냈다. 갓 샤워를 마친 탓에 바디워시 향이 방을 채웠다. 손을 뻗어 걸어두었던 샤워가운을 걸쳤다. 허리를 조이고 머리를 부비던 수건을 빨래 통에 던졌다. 곧 폭신한 침대에 등을 감쌌다. 뭐라고 보내야할까. 손에는 수건 대신 휴대폰이 들려있었다. 석진은 카톡에서 태형을 찾아 한참동안 텅 빈 화면을 지켜봤다. 회사 메신저 외에는 한 번도 얘기를 나눠본 적이 없는데 첫 문자가 임신 사실을 알리는 거라니. 제가 사고 쳐서 이번에 결혼하게 됐네요, 하는 내용도 아니고 그쪽이랑 사고 쳐서 애가 생긴 것 같네요 따위의 내용이라니. 선뜻 자판을 누를 수가 없었다.

[김태형 씨 내일 시간 돼요?]

단순해 보이지만 오랜 시간에 겨우 완성한 문장이었다. 시간 될까요?는 너무 비굴해보이고, 시간 있어요?는 너무 꼬시는 것 같고, 그렇다고 좀 봅시다는 아닌 것 같고. 전송을 누르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보내고도 문제였다. 혹시라도 읽씹 하는 건 아니겠지? 메시지를 보낸 지 1분도 되지 않았건만 속이 탔다.

[.]

그러나 석진의 예상과 다르게 카톡은 금방 1이 사라졌고 답장도 그랬다.

[630분쯤 사거리 쪽 스타벅스에서.]

[.]

이번에도 빨랐다.




  


V x JIN
샷건웨딩 shotgun wedding
03. deer in the headlights


 



어제 태형의 답장은 빨랐지만 문제는 오늘의 석진이었다. 퇴근 시간은 6, 약속 시간은 630. 그리고 지금은 650. 석진은 아직도 모니터 앞에 앉아있었다. 빨리 나가야 하는데 오늘따라 부장님이 퇴근할 기미가 안 보였다. 항상 610분이면 나가는 양반이.



[조금 늦을 것 같아요.]

[.]



휴대폰을 끼고 사는 타입인지 답장은 빨랐다. , 빨리 가야하는데. 석진은 720분이 돼서야 겨우 회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스타벅스까지 8. 평소라면 10분이면 올 거리가 사고 때문에 꽉 막혀 도로가 밀리는 것은 물론, 주차할 곳도 마땅치가 않았다. 게다가 신호는 신호대로 다 잡히기까지, 생각보다 너무나 늦어졌다. 석진의 발걸음이 미안한 마음만큼 빨라졌다.



미안해요. 일어날 수가 없어서.”



석진은 먼저 와 있는 태형을 찾아 그의 앞에 앉았다. 사람의 붐비는 곳이었지만 태형을 찾는 건 쉬웠다. 제일 잘생긴 사람을 찾으면 됐으니까.



하도 안 오기에 엿 먹이는 건줄 알았어요.”



태형이 바닥을 드러낸 자바칩 프라푸치노의 빨대를 물었다.



저 그렇게 한가하지는 않아요.”



미안함에 무료주차장까지 가지도 못하고 유료주차장에 세우고 왔건만 상대의 날이 선 반응에 석진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늦고 싶어서 늦은 게 아니었는데.



연락도 안 받으시고.”



석진은 그제서야 제 휴대폰을 꺼냈다. 무음으로 가방 안에 넣어 둬 몰랐는데, 태형에게서 메시지가 두 개나 와있었다.



미안해요. 몰랐어.”

왔으니까 됐어요.”



태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가요?”

뭐 마실 거예요?”

커피 빼고.”



먼저 보자고 한 것도 석진이고, 늦은 것도 석진인데 태형이 메뉴를 물었다.



커피 안 마실 거면 왜 커피숍에서 보자고 했어요?”

할 얘기가 있어서. 금방이면 돼요.”

무슨 할 말인데요?”

그게.”



말해야 하는데, 자꾸만 목이 탔다.



물 한잔만 마시고 얘기할게요.”



태형을 뒤로하고 카운터 쪽에 비치된 바틀에서 물을 따랐다. 별 것도 아닌 얘기였다. 그날 일로 사고가 나서 너랑 내 애가 생겼는데 난 낳을 생각도 없고 아직 2주밖에 안됐으니 약물 처방받으면 간단할거니까 아무 걱정 말라고, 그래도 일단은 말해야 할 것 같아 불러낸 거라고. 석진은 물을 마시며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이제 됐다. 자리로 돌아가려 컵을 내려놓는데 앉아있는 줄만 알았던 태형이 갑자기 손목을 잡았다.



이리 와서 이거 마셔요.”



그의 손에는 얼음 컵과 탄산수가 담긴 쟁반이 들려있었다.



아니, 나는 괜찮은데.”

한 잔만 마신다더니 지금 여섯 잔 째잖아요. 그냥 이거 마셔요.”



내가 그새 여섯 잔이나 마셨나. 카운터를 슥 보니 스텝이 이쪽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진상이 된 듯한 기분에 끄덕이며 태형의 뒤를 따랐다. 자리에 앉자 태형이 바틀을 열었다. 탄산 소리가 경쾌했다.



무슨 말이기에 그렇게 목이 타요?”

…….”

그날 그렇게 도망치고 간 이후로 처음 보는 것 같네요.”

도망이라니.”



태형이 가방에서 작은 봉투를 꺼냈다.



그날 놓고 간 넥타이에요. 비싼 거던데, 이것도 까먹고 갔으면 도망간 게 맞잖아요.”



그 넥타이는 석진이 제일 아끼는 넥타이었다. 큰 맘 먹고 산 명품 브랜드의 신상. 술 먹고 어디다 떨궜다고만 생각했는데 하필이면 김태형의 집이었다니. 저걸 저기다 놓고 온 것도 모를 만큼 황급하게 뛰쳐나갔으니 도망은 도망이었다.



그래서, 뭔데요.”



얼음 컵의 뚜껑까지 끼워 맞춘 태형이 빨대를 꽂아 석진 쪽으로 건넸다. 빨리 말해야하는데 입술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다시 입안이 말랐다. 석진은 태형이 건넨 컵을 들고 스토로우를 쭉 빨아 한 번에 반이나 들이켰다.



지금 저랑 장난하시는 거 아니죠.”

.”



꽤 비장하게 얘기를 꺼냈다. 톤이 낮았지만 작은 목소리에도 태형은 석진의 입술에 집중했다.



임신했대요.”

?”



물을 마시고 있던 것은 석진이었는데 갑자기 태형이 사레가 들린 듯 기침을 해댔다. 제대로 숨을 잘못 삼켰는지 연신 기침을 하던 태형은 도저히 안 되겠는지 잠시 나갔다 오겠다는 제스처를 취하고는 카페를 나섰다. 찬 바람을 맡고 다시 들어온 태형의 얼굴은 꽤 심각해보였다.



. 임신, 임신 했다고요.”



자리에 앉은 태형이 새기기라도 하듯 되뇄다. 자신보다 더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모습에 석진은 이상하게 마음이 담담해졌다.



.”

그런데 그걸 왜 저한테 말해요?”

?”



그것도 잠시, 태형의 대답에 석진은 마시던 탄산수를 내려놨다. 아니 애 아빠한테 말하지 그럼 누구한테 말해? 애초에 낳을 생각도 없었지만 그래도 알아야할 것 같아서 일부러 불러냈건만 태형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그날 오첩반상까지 차리며 먹이던 남자는 어디 갔단 말인가.



뭐요?”

그러니까 그걸 왜 나한테 말하냐고요.”

왜요. 말하면 안 돼요?”

김석진 씨, 오늘 저 놀리려고 부른 거 맞죠.”

보자보자 하니까 지금.”

그런 게 아니면 굳이 저한테 그 얘기를 왜 합니까?”



자신도 책임감이 없지만, 더한 태형의 반응에 어이가 없었다. 괜히 욱해져 석진이 언성을 높였다.



아니 나도 낳을 생각이 없.”

내가 김석진 씨 좋아하는 거 뻔히 알잖아요.”

…….”

뻔히 알면서 그러는 거, 그러려니 했어요. 내가 성에 안 차는구나 해서.”



지금 이 남자가 뭐라고 하는 거지?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어 석진은 태형의 말을 들으면서도 고개를 갸우뚱 저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 애를 임신했다는 사실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잖아요.”

?”

안 낳을 거면 뭐, 나보고 보호자라고 해달라고 온 거예요? 말할 사람이 주변에 그렇게 없었어요?”

김태형 씨.”

왜요. 지민이는 안 해준대요?”

잠깐, 잠깐만요.”

설마 박지민 애예요?”



왜 얘기가 그렇게 튀어! 대체 무슨 망상을 하고 있는 건지 흥분한 태형이 좀처럼 가라앉을 기미가 안보였다. 일단 태형의 망상을 멈춰야할 것 같아 석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감정을 컨트롤 할 수 없는지 모두가 있는 카페에서 태형이 페로몬을 진하게 풀었다. 그러자 카페 분위기가 급속도로 가라앉았고 베타를 제외한 오메가나 알파들은 이쪽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우성알파의 위협적인 페로몬에 석진도 팔에 소름이 돋았다.



태형 씨, 여기 공공장소인데 페로몬 좀.”



석진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태형이 한숨을 깊게 쉬더니 석진이 남긴 탄산수를 그대로 들어 마셨다. 곧 페로몬도 진정됐는지 카페 안은 다시 아까와 같은 분위기를 되찾았다.



어디까지 얘기했죠.”

그러니까.”

지민이 애 임신한 것 까지 얘기했죠? 그래서 어떻게 할 거예요.”

안 낳을 거예요.”

그럼 내가 어떻게 해주길 원해요.”



이쯤 되니 석진은 슬슬 태형의 머릿속을 꺼내보고 싶었다.



그냥 알기는 해야 할 것 같아 불렀어요.”

…….”

김태형 씨 애니까.”



석진의 말이 끝나자 아까의 사레에 이어 이번에는 태형의 딸꾹질이 시작됐다. 무표정한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갔다. 태형은 딸꾹질을 하며 석진의 얼굴과 석진의 배, 그리고 다시 얼굴을 번갈아 봤다.



그때 약 먹는다고 했잖아요.”

못 먹었어요.”

?”



히끅. 태형이 딸꾹질에 어깨가 떨렸다.



그러고 갑자기 일이 생겨서. 내가 안 먹긴 했지만 그렇게 그 일 한 번에 생길 줄은 몰랐어요.”

그때는 석진 씨 히트 사이클이었잖아요.”



태형의 말에 석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들릴지 안 들릴지 알 수 없는 목소리로 작게 혼잣말을 했다. 그렇긴 해도 진짜 그렇게 될 줄은 몰랐지. 둘 사이에 잠깐의 정적이 돌았다. 그렇지만 오가는 대화가 없던 것이지 아예 침묵은 아니었다. 아까부터 태형의 딸꾹질이 좀처럼 끝날 줄을 몰랐다.



저 잠깐 화장실 갔다 올게요.”

그래요.”



의자에서 일어난 태형은 화장실 푯말을 따라 몸을 틀었다. 그렇게 3m 쯤 이동했을까. 태형이 자리로 돌아왔다.



, 어디 가면 안 돼요?”

알겠어요.”

금방 올게요.”

알겠다고요.”



석진의 확답을 듣고서야 태형이 다시 뒤를 돌았다. 혼자 남은 석진은 태형이 다 마신 빈 얼음 잔을 스토로우로 돌렸다. 딸꾹질을 멈추러 간 건지, 뭐 하러 간 건지 금방 온다던 태형은 꽤 오래 걸리는 모양이었다. 아니 왜 이렇게 안 나와. 나 좋아한다고 해놓고.



……?”



스토로우를 돌리던 석진의 손이 멈췄다. 멍 때리고 있던 시선이 갈 곳을 잃은 듯 보였다. 석진은 텅 빈 앞자리를 보며 아까의 일을 회상했다. 분명 그랬다. 자기가 좋아하는 거 뻔히 알지 않냐고. 그럼 대체 언제부터?

태형에 대해서는 나름 잘 알고 있던 석진이다. 별로 궁금하지 않아도 지민이 매번 얘기해 줬으니까. 그냥 그 정도로 친한가보네 하고 넘겼는데, 그럼 그게 다 일부러 하는 거였단 말인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항상 칭찬 일색의 일화들이긴 했지만,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겼는데. 갑자기 얼굴이 달아올랐다. 분명 지민이 그 tmi를 늘여놓기 시작하던 때가 있었다. 그게 언제부터인지 석진이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잡고 있던 스토로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환영 회식. 분명 그 날 이후부터였다. 그렇다면 김태형은.



미안해요, 딸꾹질이 좀처럼 안 멈춰서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요열나요?



나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좋아한 거야?




* * *




 

화장실에서 돌아온 태형은 사람이 달라보였다. 아무리 화장실 갈 때 마음 다르고 올 때 마음 다르다지만 아까는 똥 씹은 표정으로 잔뜩 미간을 굳히고 있던 태형이 자꾸만 입 꼬리를 올렸다.



제 애라고요?”

.”

석진 씨랑 제 애.”

.”

지금 석진 씨가 가진 게 제 애라는 거죠.”

그렇다고요.”

그러니까 지금 석진 씨가 내 애를 가졌다는.”

, 맞다고요. 김태형 씨랑 내 애라고!”



자꾸만 같은걸 반복하는 태형이 답답해 석진은 그만 회사 근처 카페라는 것도 잊고 목에 힘을 줬다. 아차 싶어 입을 가렸건만 눈앞의 태형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 실실 웃고만 있었다.



. 제 애.”

김태형 씨, 그러니까.”

정말 운명인가 봐요.”

?”

석진 씨랑 저 말이에요.”



태형은 이제 실실대는 게 아니라 웃음을 주체할 수 없는 사람처럼 광대가 올라갔다. 석진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두 눈을 깜빡이는 것뿐이었다. 지금 뭐라는 거야? 20분 전만 해도 잡아먹을 듯하던 사람이 갑자기 무슨 운명을 얘기하고 있어.



아니 김태형 씨.”

, 석진 씨.”

뭔가 착각을 하시는 거 같은데, 저는요.”

.”

안 낳을 거예요.”

왜요?”



태형이 정말 이해가 안 간다는 순수한 얼굴로 답했다.



아니 당연하잖아요.”

뭐가요.”

미혼에 낳아서 뭐해요.”

그럼 결혼해요.”



갑자기 결혼 얘기는 왜 나오냐고, 지금.



뭔 결혼이에요. 내가 김태형 씨랑 왜 결혼을 합니까.”

그럼 안 합니까?”



너무나 당당한 말투라 누가 틀린 건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럼 우리 애는요.”

아니 안 낳는다니까요.”

왜요.”



뭘 자꾸 왜요, 왜요래. 지금 김태형 배 참을성 대회라도 하는 거야 뭐야? 인생에서 말이든 행동이든 반복하는 걸 가장 싫어하는 석진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석진은 태형의 반응에 들으라는 듯 한쪽으로 입 꼬리를 올리며 비아냥거렸다.



내가 김태형 씨 애를 왜 낳습니까.”

생겼잖아요.”

사고잖아요.”

그 날 콘돔하지 말자고 한 건 석진 씨잖아요.”

그건 히트 사이클이라 이성이.”

게다가 내가 굳이 밖에 한다고 해도 못 빼게 한 게 누군데요.”

…….”

그렇게 큰소리치면서 알아서 약 먹겠다고 신경 끄라고 도망치듯 가놓고, 이정도면 뭐가 사고에요, 사고가.”



망할 오메가 페로몬. 망할 김태형의 우성 페로몬. 왜 너는 하필 우성이라 내 이성을 몽땅 싸그리 정지시킨 건데. 반박하고 싶었지만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석진 씨, 생각해봐요.”



태형이 테이블 위로 뻗어 석진의 손을 맞잡았다. 꿈같은 하룻밤을 보내고 신데렐라처럼 유리구두 대신 명품 넥타이를 두고 간 석진이었다. 그 뒤로 돌려주려 했지만 그날 밤을 없던 것처럼 행동하는 석진에 태형도 별 방도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별로였나, 태형은 태형대로 상처 입었었다. 그날 밤은 분명 좋았는데. 확고하게 선을 긋고 자신에게서 도망쳤던 석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불러내 임신을 했다니 태형은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나 싶었다. 자신과의 하룻밤에는 치를 떨 듯 가놓고 아이가 생겼다는 통보라니. 자신과의 아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알아서 피임약도 먹겠다고 큰 소리도 쳤으니까. 그렇다면 다른 사람과 아이를 가졌으니 너는 이제 나를 포기하라고 돌려 말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 아이라니. 당신과 나의 아이. 정말 운명이라는 게 있나 싶었다. 한번 전체의 고작 2할인 알파와 오메가가 같은 회사의 휴게실에서 히트 사이클로 엮일 확률을 생각해보자. 이게 운명이 아니면 무엇을 운명이라고 부른단 말인가? 인연의 형태란 여러 가지이다. 입맞춤에서 시작되는 관계도 있고, 원나잇으로 시작하는 관계도 있다. 하물며 아이가 생겨서 시작하는 관계도 있을 수 있는 것 아니겠다고 태형은 생각했다

태형은 충분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직 1년차지만 앞으로의 비전도 괜찮았고,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누나 덕분에 집안에서도 흔쾌히 반길 일이었다. 지금 살고 있는 오피스텔이 둘이 살기에 충분하니 집을 합치는 것도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석진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있었다. 태형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태형은 석진을 아주 잘 알았다.



석진 씨랑 내 애잖아요?”

그쵸.”

얼마나 예쁘겠어요.”

?”

석진 씨랑 내 얼굴인데, 애가 좀 잘생기고 예쁘겠냐구요.”



보통 이런 얘기를 들으면 이게 뭔 소리냐고 넘기겠지만 김태형이 아는 김석진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김석진은 자기 얼굴에 꽤나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태형 또한 그랬다. 괜히 4층의 걔와 12층의 걔가 아니었다.



내 얼굴이랑 태형 씨 얼굴.”

.”

예쁘겠네요.”

그렇죠.”

근데 무슨 애를 얼굴 보고 낳아요.”



하지만 석진은 이성적이었다.



그리고 아플 거고.”

아파요?”

아니, 지금 말고.”



어디가 아프냐며 자리에서 일어나 석진을 살피려는 태형을 간신히 말렸다.



나 아플까봐 귀도 안 뚫었는데.”

.”



석진의 말에 태형이 고개를 푹 숙였다. 양 어깨가 잘게 떨리는 게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비웃습니까?”

, 아니에요.”



태형이 손사레를 치며 석진과 다시 눈을 맞췄다. 이 남자가 이런 남자였나 싶을 정도로 얼굴에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원나잇 사건 후 매번 자신에게 무뚝뚝했던 태형이다. 때문에 석진도 더 공적으로 대하기도 했지만. 감정에 솔직한 태형에 심장이 간지러웠다.



귀여워서요.”



솔직해도 너무 솔직한 말이었다. 석진은 고백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얼굴이 훅 달아올랐다. 괜히 민망해 텅 빈 얼음 컵의 빨대를 물었다.



어쨌든 우리 좀 더 생각해봐요. 어린 나이에 사고도 아니고, 서로 책임질 수 있잖아요. 석진 씨 혼자 만든 애도 아니고. 우연도 아니고 거의 필연인데. 일단 석진 씨가 우리 집으로 들어올래요? 아니면 내가 가도 되고.”



차근차근 하나하나 하다보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우연을 필연으로 그리고 운명으로 말이다.



싫은데요.”



아직은 조금 멀어보지만…….





미국은 땅이 워낙 넓다보니 깊은 숲속이나 공원 같은데서 사슴이 갑자기 뛰어나오게 됩니다. 교통표지판 중 사슴이 자주 나온다는 표지판도 있습니다. deer in the headlights 는 (밤에) 헤드라이트를 켜고 차를 몰고 가는데, 갑자기 헤드라이트에 사슴이 보인다라는 말입니다. 갑자기 사슴이 보이게되면 많이 놀라겠죠 결국 많이 놀라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deer in the headlights 라고 표현합니다.

라고 네이버 지식in에서 하네요. 디어인더헤드라이트는 제가 좋아하는 아울시티 노래인데.. 아주 귀여워요. 가사도 귀여워요 나는 주차장에서 안녕했을 뿐인데 갑자기 후추 스프레이에 맞는 내용...

아 그리고 태형이가 신입이긴하지만 석진이도 아직 사원2년차라 석진 씨라고 부르고 있어요!

선배라고 해도 되겠지만 태형이가 석진 씨하고 부르는게 좋아서.. 어차피 부서도 다르고.. 지민이보다 6개월정도 먼저 들어왔는데 석진이는 다른곳에서 1년정도 있다가 입사했다는 설정입니다!


🐱 봐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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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그래보이지 않지만 두시간이나 고르고 고른 브금..입니당*^^*





망했다

면접장을 나온 태형은 면접 내내 목을 조이던 넥타이를 풀었다. 그동안의 모든 취업 준비가 이곳을 위한 것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니 하필이면 그때 딸꾹질이 나올게 뭐람

다른 곳보다 배로 준비한 면접이었건만 보기 좋게 말아먹었다. 도무지 멈추지 않는 딸꾹질에 면접장을 나와 지하철을 탈 때까지 얼굴이 화끈거렸다가뜩이나 동기들보다 취업이 일 년이나 늦어져 불안한 태형이었다. 딸꾹질은 집에 돌아와 이불에 누울 때까지 이어졌다.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결과야 보지 않아도 뻔할 것이다. 굳이 두 눈으로 불합격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신년이 되자마자 용험하다는 점을 보고 온 복채가 아까웠다 뭐, 만사가 형통해?  형통하기는 커녕 만사가 목구멍으로 튀어나온 것 같았다.

이력서에 쓴 컴퓨터 활용능력 1급은 뻥인마냥 태형은 타자 50도 안 나올 속도로 키보드를 천천히 눌렀다. 이 다음 페이지에 나타날, 이제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읊을 수 있는 문구가 눈에 선했다. 귀하와 같은 우수 인재와 함께 하지 못함을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다음에 더 좋은 기회를 통해 만나뵙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곧 빼곡하게 채워질 문장에 머리부터 벌써 지끈거렸다.  태형의 한숨과 함께 어깨가 축 쳐졌다. 올해 하반기를 못 채웠으니 내년도 백수로 시작하려나. 태형의 약지가 경쾌하게 엔터를 내려쳤다. 

결과는 최종 합격이었다.





입사 후 얼마 안 있어 신입사원 환영회가 열렸다. 말이 환영회지, 몇 명의 입사동기와 선배들의 첫 술자리에서 태형은 주는 대로 받아 마셨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태형은 술을 못했고, 덕분에 신입들 중 제일 먼저 취해 간신히 정신만 붙잡고 있었다. 다시 빈 잔이 채워졌고 태형은 잔을 들었다. 본능적으로 이 이상 마시면 안 된다는 게 느껴졌다. 이걸 마시면 정말 다 놔버릴 것 같아. 하지만 받아든 잔을 내려놓을 수는 없었다. 아직 한 달도 안 된 신입에게 거부권이 있을 리 만무했다. 못 마시면 안 마셔도 돼. 선배는 사람 좋은 얘기를 했지만 냉큼 그러겠노라 할 수 도 없는 노릇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마시고 죽지 뭐 하는 마음으로 잔을 드는 그때였다. 찬 공기 냄새가 났다. 온풍기에 한껏 달궈진 공기가 그 주위만 서늘하게 내려앉는 것 같았다. 서느런 바람 냄새와 함께 텅 비어있던 태형의 옆 자리가 찼다. 옆 자리의 남자는 마치 옷장 깊이 넣어뒀던 새 이불의 감촉 같았다. 술기운에 정신이 몽롱한 태형은 천천히 남자의 이목구비를 살폈다.



, 솜이불.”



썩 찬 느낌이 있지만 보드랍게 감싸는 겨울 솜이불이었다. 남자의 솜이불을 닮아 있었다. 그중에도 무겁게 축 처진 것이 아닌 얇게 틀어진 솜이불. 남자는 태형이 들고 있던 잔을 빼앗듯 받아내더니 단숨에 비웠다. 늦었네. 태형의 앞에 앉아있는 사수가 말을 건넸다. , 마무리 할 게 있어서. 남자는 여태껏 태형이 마시던 잔에 술을 받으며 대답했다. 이제 막 퇴근해 사원증을 빼는 것도 잊은 모양이었다. 김석진. 잘생긴 사진 아래 얼굴만큼 잘생긴 이름 석 자가 쓰여 있었다.



그만 먹여. 얼굴 터지겠다.”

남의 부서 신입한테 엄청 다정한 척 하네.”



사수와 석진이 다시 잔을 부딪쳤다. 단숨에 한 잔을 비운 석진이 태형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새 몇 잔의 술에 몸이 데워졌는지 남자의 양 볼이 따뜻하게 물들었다. 석진은 태형의 얼굴부터 아래까지 스캔하듯 눈을 굴렸다. 검은 눈동자가 천천히 굴러가는 게 꼭 또로록하고 소리가 날 것 같았다.



신입이에요?”

, .”

잘생겼네.”

, .”



태형이 기계적으로 대답하며 석진의 잔에 술을 따랐다. 안 잡아먹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이윽고 부딪히는 유리 소리가 맑았다. 태형은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잘 몰랐다. 상대가 물으니 대답할 뿐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대답을 무시할 만도 하건만 상대는 웃으며 태형의 잔을 대신 마셔주었다. 잔이 채워지고, 비워졌다. 무르익어가는 술자리에서 태형의 얼굴은 더욱 무르익어갔다

보통 첫사랑하면 언제를 떠올릴까. 고등학교 아니면 대학교 때? 김태형으로 말할 것 같으면 바로 지금이었다. 그렇다고 연애를 못 해본 것은 아니었다. 손으로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의 오메가와 베타를 만났지만 어느 정도의 호감과 흥미만 있었을 뿐, 첫사랑이라고 일컬을 상대는 없었다. 걔 어디가 좋아서 만나? 하고 묻는다면 그냥. 하고 대답하는 것이 김태형의 연애였다. 가슴 설레는 연애는 소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중 가장 말이 안 되는 건 첫눈에 반하는 줄거리였다. 사람이 어떻게 첫눈에 반하나. 스물일곱의 김태형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서사는 아주 단순했다. 김태형은 취했고, 술을 못했다. 그리고 김석진은 웃었고, 술을 잘했다.

첫 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태형은 씻자마자 책상에 앉았다. 취기 같은 건 이미 새벽바람에 깬지 오래였다. 아니면 솜이불에 씻겨냈을지도. 자리에 앉아 얼마 전 받은 신년 다이어리를 꺼냈다. 흔한 가죽 디자인이었지만 회사 로고가 새겨진 기념비적인 첫 입사 다이어리였다. 너무 아까워 아직 제대로 쓰지도 못한 그 대망의 첫 장에 태형이 펜을 들었다. 운명. 이건 분명 운명이라고.






V x JIN
샷건웨딩 shotgun wedding
02. 첫눈에 반하기는 힘들어





뭐래?”



운명을 만난 그 다음날부터 태형은 저보다 일 년 먼저 입사한 대학동기인 지민을 잡고 늘어졌다. 처음으로 맡게 된 프로젝트가 어디까지 진행됐냐며 매일 쪼던 과장대신, 이제는 매일 어떻게 됐냐며 묻는 태형 덕분에 지민의 메신저가 새 알림으로 가득했다.



너 귀엽대.”

아 진짜?”



야근 때문에 지민은 가지도 못한 회식에서 제 사수와 무슨 일이 있던 건지, 태형은 지민에게 석진이 좋아하는 색이나 입맛, 향수, 장소 따위를 물어왔다. 처음엔 귀엽다고 생각했다. 예쁨을 받기 위한 (부서는 다르지만, 어쨌든.) 신입의 노력이 가상하다 생각해 지민은 아무 생각 없이 물어봤고, 전해줬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분홍색 넥타이를 매고 온 태형의 모습은 조금 가관이었지만

대학 때도 태형이 고백을 받는 건 많이 봤어도 먼저 고백하거나 누가 좋다고 얘기한 적이 없었기에 꽤 신선하기도 했다. 타인의 3차 성별을 언급하는 건 조금 실례이긴 했지만, 지민이 아는 대로라면 둘은 알파와 오메가였다. , 둘의 조합이 꽤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게 이틀을 이어 삼일, 이제는 한 달이 돼가니 지민은 제발 빨리 둘이 사귀든지 아니면 그냥 차든지 어서 석진이 결정하기를 바랐다.



주말에 태형이네 놀러갔는데, 걔 김치찌개 진짜 잘 끓여요.”

대단하네.”

형이랑 그때 갔던 김치찌개 집보다 더 맛있었어요.”

잘 하나보네.”



처음엔 태형의 이야기에 맞장구도 잘 쳐주던 석진이었는데, 이제는 매일 점심시간마다 이어지는 김태형의 tmi에 슬슬 지쳐가는 모양이었다. 석진의 기계적 반응에 오히려 지민은 마른 침을 삼켰다. 이쯤 되니 걱정이 됐다. 혹시 이 형이 내가 태형이를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그래도 지민의 이야기를 별로 흥미롭게 듣지는 않아도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자신의 할당량을 채운 지민은 오늘도 불이 들어와 있는 태형의 메신저를 열었다.



뭐래?”

너 대단하대.”

아 대박.”



항상 패턴은 같았다. 같이 회사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탕비실에서 커피를 타고, 자리에서 이어지는 잠깐의 수다. 지민이 먼저 꺼낸 태형의 tmi에 심드렁하게 반응하는 석진. 조금 지겹기도 했지만 쳇바퀴같이 굴러가는 직장인의 삶에는 안정된 패턴이기도 했다

하지만 김태형 tmi가 이어진지 백 일하고도 하루째가 되던 날태형이 입사 백일을 기념하며 작은 초콜릿 꾸러미를 돌리기도 한 그 날. 도무지 깨지지 않을 것 같았던 둘 사이의 작은 규칙에 금이 갔다. 석진이 먼저 태형을 언급한 것이다.



근데 걔 말이야.”

?”

나보다 잘생겼어?”



평소와 마찬가지로 시선은 스마트폰에 집중해있었지만 미세하게 구겨진 미간이 석진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나타냈다.



둘 다 잘생겼는데.”

아니 자꾸 사람들이 비교하잖아. 세 살이나 어린 신입이랑 나랑.”

.”

속상해.”



속상해요 형? 저도 그래요. 자리에 돌아온 지민은 새 알림이 가득한 메신저를 로그아웃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그래도, 그래도. 아직까지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폭풍은 이제부터였다.




* * *



걔는 일한지가 세 달이 지났는데 아직도 이걸 틀리면 어쩌자는 거야.”

누구요?”

네 친구.”



내 친구, 태형의 이야기였다. 지민은 조용히 카카오 톡을 켜 친구에게 메시지를 전송했다. 너 형한테 무슨 짓 했어? 평소 카톡 텀은 꽤 긴 태형이라고 생각했건만 보내자마자 진동이 울렸다. 아니. 짧은 대답이었다.



“0을 하나씩 빼먹어서. 그냥 내가 컨펌 하기로 했어.”

부서가 다른데요?”

애초에 우리가 마지막에 서명 들어가서. , 몰라. 위에서 내가 하라는데 뭐 어쩌겠어.”



가뜩이나 야근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석진이다. 야근을 할지언정 특근을 한다고 할 정도로 밤늦게까지 회사에 있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석진이 자신의 일도 아닌, 자기 부서일도 아닌 남의 부서 일을 떠맡게 됐으니 태형이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제 친구의 연애사도 연애사지만 일단 지민은 상사의 기분을 맞춰주는 게 우선이었다. 하지만 상황을 알 턱이 없는 태형의 메시지는 여전했다.



뭐래?”

몰라.”

매일 반복되던 대단원의 김태형 tmi가 막을 내렸다.




* * *




그렇게 며칠은 잠잠했다. 본인의 실수를 전해들은 태형은 (아무도 시키지 않은) 묵언수행을 하며 자신을 반성했다. 석진은 알 턱도 없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냐 싶었지만 온갖 사담과 닦달로 가득했던 메신저가 조용하니 지민도 굳이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이렇게 포기하나 싶었건만, 지민의 평온을 얼마 가지 않았다. 한 삼일정도. 삼일천하가 아니라 삼일평온이었다.


[술 한 잔 하자.]


마침 지민이 불금에 잡았던 약속이 깨진 걸 알기라도 하는 듯, 태형에게 서 온 메시지가 울렸다. 얼마 전 완전히 손을 턴 프로젝트 덕분에 남은 업무도 없는 지민이다. 오랜만에 칼퇴. 그것도 금요일의 칼퇴. 한 주의 마무리를 기다리며 지민이 콧노래를 불렀다

그건 석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몇 주 전부터 클럽 테이블을 예약했다고 오랜만에 불금이라며 지민에게 자랑 아닌 자랑을 했던 석진이다. 분명 지금쯤이면 오늘은 뭘 입고 어디서 뭘 할지 시간대별로 잘 짜여진 일정을 자랑할 만도 한데, 퇴근 10분을 넘기고도 석진은 통 일어날 기미가 안 보였다.



안 가세요?”

? . 먼저 가.”

뭐 남으셨어요? 다 끝나지 않았어요?”

네 친구 꺼.”



아차. 지민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0만 빼먹은 줄 알았더니 오타도 있어. 잡아내느라 죽겠다.”



사수가 퇴근하지 않는데 어떻게 부사수가 그냥 갈 수가 있으랴. 지민은 그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같이 하겠다는 지민을 다음 주에 보자며 강하게 만류하는 석진이 아니었다면, 태형은 아마 퇴근길로 붐비는 이자까야에서 혼술을 해야 했을 것이다. 불금을 야근으로 바꾼 사수를 뒤로 하며 지민은 지금쯤 이자까야에 앉아있을 태형을 떠올렸다태형아, 아마 안 될 것 같다.



* * *



내가 실수하고 싶어서 실수한 게 아닌데.”


고작 생맥주 500 두 개로 테이블에 얼굴을 부비고 있는 친구를 보며 지민은 한숨을 폭 쉬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지. 무슨 죄를 지어서 얘를 우리 회사에 붙이려고 아는 것 모르는 것 죄다 끌어다 팁까지 얹어줬지. 술이 한 모금씩 들어갈수록 점점 테이블과 한 몸이 되어가는 태형을 보며 지민은 스스로를 자책했다.



한번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자.”

지금?”

. 더 이상 질질 끌어봐야. 나 어떻게 생각 하냐고.”

내가?”

난 번호도 몰라!”



사원 이름 검색하면 뜨는 게 전화번호인데. 왜 자신이 물어야 하는지 지민은 알 수 없었지만 술에 취해 우기는 김태형을 이길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지민이 아는 한. 아무래도 지금은 타이밍이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지만, 내 연애도 아니고

지민은 태형이 시키는 대로 카카오 톡을 열었다. 태형이 한 잔 마실 때, 두 잔을 비운 지민이라 태형만큼 취한 것은 아니었지만 손가락이 자꾸만 ㅜ를 ㅗ로 누르고 있었다. 이러다간 태형과 마찬가지로 오타로 엮여 불똥이 튈지도 모른다. 최대한 정신줄을 잡으며 문장을 고쳤다. 바야흐로 시간은 한창 금요일의 밤이 무르익는 943. 지금쯤이면 퇴근했을, 아니 어쩌면 아직도 태형의 오타와 씨름하고 있을 석진에게 메시지를 전송했다.

[, 4층에 김태형 말인데요. 걔 어때요?]



보냈어.”

뭐래?”

보낸 지 1초도 안 됐는데 벌써 답이.”



왔네. 지민은 잠금 화면에 뜬 석진의 답장을 태형과 함께 공유했다. 지민이 보낸 것보다 더 간결한 답장이었다.

[, 존나 별로.]

오직 다섯 글자로 이루어진 14byte의 간략한 텍스트. 그러나 어떤 대답보다 임팩트 있었으며 아주 확고하게 보낸 이의 뜻을 담고 있었다</system: 다음 기회에!>  머릿속에 경고음이 울렸다.

누가 그랬더라.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아 아름답다고. 태형의 첫사랑도 그랬다. 지금까지의 연애는 그냥 연애였다. 오직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관계가 아니라 적당히 시작하고 보는 플라스틱 러브. 서로가 나쁘지 않고 호감도 없지 않으니 한번 만나보는, 그렇게 일정의 수순을 거쳐 이별하는 연애. 戀愛라기보다는 然愛같은 그런 연애

아주 사소한 계기에서 시작한 마음이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상대에게 직접적으로 전하지도 못했지만 좋아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자체가 좋았다. 상대는 내가 좋아하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꼭 드라마나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아 하루하루가 설레고 두근거렸다. 처음이었다. 조금 허무하게 끝나버렸지만, 이렇게 마음을 묻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존나 별로라는 말을 듣고도 모른 척 다가갈 용기까지는 없었다. 차라리 혼자 묻는게 낫지, 정말 차이다가는 회복불가능 상태에 들어갈 것 같았다. 회사의 업무에 익숙해져 갈수록 석진과 엮이는 일도 점차 많아졌다. 그럴 때마다 태형은 더더욱 마음을 감췄다. 여전히 좋아하지만, 좋아하지 않는 척. 여전히 가슴 한편이 간질거리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싫어하는 상대에게 고백 받는 게 얼마나 당황스럽고 더 나아가 기분 나쁜지 잘 알고 있는 태형이었다. 석진의 앞에 설수록 태형은 자신의 마음을 꼭꼭 감췄다. 자신을 위해, 그리고 석진을 위해. 여기서 매듭을 짓는 게 옳은 일이라 생각했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 * *



 

.”



연이은 야근에 태형은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대기업이 괜히 대기업이 아니었다. 높은 연봉과 비례하는 높은 업무 강도. 끝나기라도 한다면 밤 10시라도 나름의 칼퇴였다. 어느 날은 새벽 4시에 퇴근하고 아침 9시에 출근한 날도 있었다. 이제는 평일과 주말의 경계도 모호해졌다. 어느새 시간은 오후 8시를 넘기고 있었다. 부서의 모두가, 아니 어쩌면 4층의 모두가 퇴근할 시간이 돼서야 태형도 퇴근할 희망이 보였다. 조금만 마무리하면 되겠다. 곧 끝이라는 긴장이 풀리자 급 피로가 몰려왔다. 아무래도 커피 한잔을 마시고 10분정도는 눈을 붙여야할 것 같았다

태형은 모두가 퇴근해 아무도 찾지 않을 휴게실로 엘레베이터를 눌렀다. 휴대폰을 열자 상단 바가 오늘이 금요일을 알렸다. 남들에겐 불금이니 뭐니 하는 날이었지만 태형에게는 이미 흐려진지 오래였다. 회사-야근--회사-야근-. 어디 안 놀러가도 좋으니 집이라도 가고 싶다믹스커피를 뜯는 태형의 손길이 퍽 간절했다. 하지만 태형을 반기는 건 폭신한 솜이불이 아닌 텅 빈 휴게실의 찬 공기였다. 20. 알람을 설정하고 딱딱한 바닥에서 잠을 청했다. 거의 이틀을 새우다시피 한 태형이기에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밤을 새워서 정신이 몽롱한 건지 아니면 잠이 들어 나른한 건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아읏.”



때문에 태형은 지금 자신이 잠꼬대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분명 이 휴게실에는 태형 혼자였다. 불규칙적인 생활패턴에 몸이 엉망인지 페로몬마저 뒤엉켜 오메가의 것처럼 된 모양이었다. 꿈이라도 꾸는 걸까. 페로몬은 점점 진해져 아무 것도 먹지 않았음에도 입안이 달았다. 몇 번 오메가를 만난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맘에 든 적은 없었는데. 내 페로몬이라 그런 건지, 텅 빈 휴게실에 가득 찬 오메가 페로몬이 간지러웠다. 텅 빈 휴게실과 페로몬…….

아니, 잠깐만

아무리 컨디션이 엉망이여도 알파인 나한테서 오메가 페로몬이 날 리가 없잖아! 답이 명백한 논제에 잠은 그대로 날아났다. 자신의 잠꼬대라고만 생각했는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태형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뜬 눈에 사방이 캄캄했다. 하지만 곧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의 끝에 인영이 닿았다. 히트 사이클의 오메가. 우성 알파인 태형의 이성을 무너뜨릴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오래있다가는 장담할 수 없었다

빨리 나가야해. 태형이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휴게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문으로 향하는 게 오메가에게 가까워지는 꼴이 됐다. 가까이 다가와 얼굴을 맞대니 오메가의 얼굴이 낯익었다. 낯익다 못해, 너무나 잘 아는 얼굴이었다.



석진 씨?”



덕분에 페로몬은 더욱 짙어졌다. 석진이라는 사실에 흘려지는 우성 알파의 페로몬도, 거기에 반응하는 오메가의 페로몬도 함께.



. 히트 사이클이에요?”



어쩌면 알파와 오메가로서 너무나 당연한 본능적인 끌림일 수도 있겠지만, 존나 별로 사건 뒤로 업무 외에는 마주친 적이 없던 지라 태형은 석진이 꽤 반갑기도 했다. 빨리 나가야하는데, 나가야 하는데. 점점 짙어지는 페로몬은 너무 달다 못해 씁쓸하기까지 했다.



제가 나갈게요. 그러니까 제가 알파라서…….”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알 텐데. 이대로라면 자신까지도 힘들어질 것 같았다. 정말 빨리 나가야하는데, 빨리.



가려면 빨리 가요.”

아니 그게.”

뭐요.”



이성은 어서 나가야한다고 태형을 재촉했지만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아직 석진은 인지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석진이 먼저 태형을 소매를 잡고 있었다. 열에 들떠 손가락 끝까지 힘이 풀린 석진이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힘을 줘 뿌리친다면 쉽게 빠져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석진이었다. 김석진, 이름 세 글자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꽁꽁 싸맸던 감정이 하나 둘, 끈을 풀었다.



놔줘야 가죠.”



잠깐의 정적은 주문이었다. 밀실의 오메가와 알파, 그리고 히트 사이클운명은 마치 우연을 가장해 필연을 연기했다.

 






격주연재한다더니 거의 6개월만에 올리는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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샷건웨딩은 블로그에 올라온 연재분보다 포스타입에 올린 버전으로 읽으시길 추천드립니다!

맞춤법 등이 수정돼 읽으시기 더 편할 것 같다고 생각해요!


https://jin-doing.postype.com/post/1656799








좆 됐다.

석진은 길지도 짧지도 않은 삼십 년 인생사에서 세 번의 좆 됨을 경험했다. 첫 번째는 40점 맞은 시험지를 90점으로 거짓말 친 후에 갈기 갈기 찢어 변기에 내렸다가 점수 부분만 고대로 떠오르는 바람에 죽도록 혼났던 초등학교 5학년 때이고, 두 번째는 친구와 문자로 담임 욕을 하던 것을 실수로 담임에게 보내버린 고등학교 2학년 때이며, 그리고 세 번째는 낯선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바로 지금이었다.

낯선 천장과 낯익은 남자 그리고 허벅지에 흐르는……. 석진은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에 다시금 눈을 감고 싶었다. 꿈이라기엔 모든 감각이 너무나 선명했고 어제의 기억이 뚜렷했다. 난감한 상황이 오면 드라마 주인공들은 잘도 기절하던데. 기절하고 싶어 하면 할 수록 더 또렷해지는 정신에 울고만 싶었다. 석진은 초등학교 때 달란트 시장 때문에 갔던 것이 전부인 신앙심으로 두 손을 고이 모았다. 주님, 제발 제 옆에 놈이 기억하지 못하게 해주세요. 

하지만 석진의 기도가 하늘에 닿기엔 신앙심이 너무 모자랐다.


"일어났어요?"
"……."
"아침 먹을래요? 보통 뭐 먹어요?"


락스요.








V x JIN
샷건웨딩 shotgun wedding
: 속도위반 결혼







김석진과 김태형은 사내의 유명 인사였다. 이 둘이 유명한 이유는 세 가지였는데 첫 번째는 얼굴이요, 두 번째는 비주얼이요, 세 번째는 와꾸였다. 비록 쓰는 층도 다르고 하는 업무도 달랐지만 한 명은 4층의 걔였고, 한 명은 12층의 걔로 불렸다. 석진은 12층에 걔 알아? 하면 잘 모르는데요. 하고 심드렁하게 대꾸했지만 사실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같은 부서인 지민의 친구였기 때문인데, 지민과의 하루 대화 중 7할이 태형이었다. 별 관심 없는 주제였지만 딱히 할 얘기도 없으니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쉬는 시간까지 쓸데없는 업무 얘기로 골치 아픈 것보다야. 그러나 많은 카테고리를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석진은 항상 심드렁 할 뿐이었다.


그런 태형의 이미지가 얼마 전 석진이 떠맡게 된 업무로 인해 90도 바뀌었다. 그 프로젝트는 하필 "4층의 걔'네 부서의 뒤처리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태형이 담당하던 것이었다. 타부서 건을 뒤처리하게 된 것도 찜찜한데 온갖 오타와 수정사항으로 석진은 가뜩이나 하고 싶지 않은 야근을 사흘 내내 매달려야 했다.

그 마지막 사흘 째. 부서에 홀로 남아 야근하는 석진에게 먼저 퇴근한 지민이 카톡을 보내왔다. 형 4층에 김태형 말인데요. 걔 어때요? 하고 한 줄. 사실 따지자면 태형이 특별히 잘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날은 석진이 클럽에서 테이블까지 잡고 놀기로 한 불금이었다. 단조로운 카톡 한 줄은 불금을 야근으로 반납해야 하는 원인인 김태형의 이미지가 90도 꺾이는 반환점이 됐다. 무관심에서 비호감으로. 석진은 차분하게 잠금을 해제하고 답장을 썼다. 응, 존나 별로.


그리고 지금 석진의 눈 앞에는 존나 별로인 그 남자가 누워있었다. 석진의 얼굴은 누렇게 떴고 커튼 너머로 들어오는 태양빛마저 누랬지만 남자의 얼굴은 그 누구보다 환했다.



#



존나 별로 사건 이후로 석진은 지민에게 더이상 태형의 이름을 들을 수 없었다. 아쉬운 것도 아니고 별 관심도 없었지만 매일 듣던 이름이 사라지니 궁금해 묻자, 지민은 웬 자다가 봉창 두들기냐는 표정으로 차여서 요즘 조용해요, 로 일축했다. 아무튼 석진과 태형의 인연은 별것 없었다. 근데 왜 이렇게 됐을까. 석진은 제 옆에 누워있는 태형을 보며 생각했다. 사건은 단순했다. 히트 사이클의 오메가와 밀실 그리고 알파.


반복되는 야근에 석진은 그만 히트사이클 주기를 잊어버렸고 그대로 회사에서 터지고 말았다. 요근래 몸이 무겁다했더니 곧 히트사이클이란걸 잊어버린 것이었다. 아래서부터 열감이 올라와 금세 목은 물론 귀까지 발갛게 달아올랐다. 녹진해진 몸은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 다행히 부서엔 혼자 남아있었지만 혹시라도 누가 온다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젠장할. 속으로 욕을 삼키며 석진은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휴게실로 향했다. 빨리 끝내고 집에 가기 바쁜 금요 야근에 휴게실에 올 사람은 없을 테니까. 히트사이클이라 한들 알파와 접촉만 없다면 몸살정도로 끝날 일이니 석진은 휴게실에서 사람들이 퇴근하기를 기다릴 요양이었다. 간신히 휴게실로 온 석진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문을 잠갔다. 불이 꺼진 휴게실은 컴컴했고, 아무도 없는 듯 했다. 안심이 되자 다리가 풀렸고 그대로 주저앉아 서늘한 철문에 몸을 기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몸이 점점 민감하게 느껴졌다. 분명 혼자 있는데. 설마 문이 열려있나, 하고 석진은 다시 다리에 힘을 줘 떨리는 손으로 문을 살폈다.



"석진 씨?"



석진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다시 그대로 주저앉았다. 망할. 누가 있을 줄이야. 회사에서 항상 흐트러짐 없던 석진이기에 이런 모습을 누구에게 보인다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아니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어디 아파요? 하고 다가오는 한 걸음 하나하나에 반응해 뒤가 젖어왔다. 전체의 8할이 베타, 고작 2할만이 오메가-알파인 세상에서 운도 더럽게 없지. 석진은 스스로를 자조했다. 심지어 상대는 우성 알파였고, 하필이면 또 김태형이었다. 



"아…. 히트 사이클이에요?"



평소 같으면 별 와닿지도 않을 목소리가 왜 이렇게 달디 단지. 망할 호르몬. 망할 페로몬. 석진은 자꾸만 젖어오는 뒤가 간지러워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제가 나갈게요. 그러니까 제가 알파라서……."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파인 게 다 느껴지는데. 석진은 제가 문 앞을 막고 있는 것은 잊고채 아까부터 어쩔 줄 몰라 오도 가도 못하는 태형에 짜증이 났다.



"가려면 빨리 가요."

"아니 그게."

"뭐요."

"놔줘야 가죠."



석진은 그제야 제가 태형의 옷깃을 꼭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둘 사이엔 정적이 흘렀다. 잠깐의 침묵. 그 묘한 공기속에서 둘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입술을 부볐다. 망할 호르몬. 망할 페로몬. 석진은 제 품의 남자를 보며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필이면 김태형이었지만 다행히도 잘생겼으니까. 


페로몬에 들떠 히트싸이클까지 겹친 정사는 회사 휴게실에서 석진의 차로 그리고 태형의 오피스텔까지 이어졌다. 사고가 녹아내릴 것처럼 머리가 끈적끈적해 서로를 탐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 여름밤의 꿈이기에는 모든 것이 현실이었다. 이제 그만하라며 울며 애원하던 어제를 잊고 싶지만 여기저기 쑤시는 몸이 반증했다. 다행히도 김태형이라 생각했던 어제와 하필이면 김태형이냐는 오늘이 서로의 뺨을 쳐댔다. 석진은 제 맞은편에 앉아 아침 댓바람부터 김치찌개에 오첩 반상을 차리는 태형을 보며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입에 맞아요?"
"우리 콘돔했어요?"



태형이 먼저 한 술을 뜨는 석진에게 물었으나 오는 답은 없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태형은 당황한 얼굴로 어젯밤을 다시 되짚어보았다.



"어제… 그러니까…. 석진 씨가 저를 갑자기 막 그래서… 어…."
"그래서. 우리 안 했죠."
"안 한게 아니라 못 한거죠."




태형의 말에 석진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반 공기가 줄 때까지 석진은 고개를 들지 않고 밥만 먹었다. 바로 앞에 앉은 석진이 그러니 태형은 저만 잘못한 것도 아닌데 자꾸만 눈치가 보였다.



"사고죠."
"네?"
"사고라고요 우리."



그래도 밥이 입에는 맞는지 한 공기를 뚝딱 비운 석진이 아직 반도 못 먹은 태형에게 말했다.



"사후 피임약은 내가 알아서 먹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
"잘 먹었고, 어… 어제도 뭐 잘…."



딱히 어제의 일을 뭐라 정의할 수 없어 석진은 말 끝을 흐렸다. 그리고 제가 먹은 것을 싱크대에 넣어두고 제 발 저린 사람마냥 빠르게 태형의 오피스텔을 빠져나왔다. 엑셀을 끝까지 밟아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석진은 곧장 욕실로 들어갔다. 원나잇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제정신이 아닌 새에 치뤄진 흑역사에 석진의 제정신이 소리없는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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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되는 듯했다. 혹시 소문이라도 나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주변 사람들은 물론 지민까지도 태형의 태 자도 꺼내지 않았다. 한 이 주는 흑역사의 늪에서 현타의 반복이었으나 석진도 이제는 모든 걸 잊은 사람처럼 굴었다. 태형과 마주칠까 회사 식당도 안 가던 석진이었는데 이제는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태형을 마주쳐도 아무렇지 않아 했다. 흑역사의 계절이 가고 다시 야근의 계절이 왔다. 석진은 새 프로젝트를 맡아 지민과 이틀이나 회사를 철야로 지새웠다. 또 저번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석진은 바쁜 와중에도 꼬박꼬박 싸이클 주기를 확인하고, 날에 맞게 연차까지 신청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주기가 돌아와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억제제를 먹어도 월月의 한 번은 몸이 무거워 움직이기가 힘들어야 정상인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석진은 침대에서 일어나 어플을 켜 사이클 주기를 다시 확인했다. 이렇게 가벼울 리가 없는데. 다시 확인하고 확인해도 분명 오늘인데. 항상 주기가 일정했던 석진이기에 더 의아했다. 그리고 그때, 잊고 있던 기억이 석진의 뒤통수를 빡 때렸다. 설마했던 흑역사가 떠올랐다. 석진은 아니야. 그럴 리가 하며 실내화를 신은 채로 집 앞 약국으로 갔다. 막 자다 깬 게 분명한 차림새로 약사를 잡고 약국에 있는 테스트기를 종류별로 다섯 개나 사왔다.


-사후피임약은 내가 알아서 먹을게요.


분명 그렇게 말하고 태형의 집을 나온 석진이었건만 당일은 주말이라 병원에 가 처방을 받지 못했고, 그 다음날은 갑작스레 들이닥친 오디트 준비로 반차나 연차를 낼 틈이 없었다. 야근의 수레바퀴 속에서 석진은 태형의 시야를 피해 다닐 궁리는 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처방을 받으러 가는 것은 잊고만 것이다.

히트 사이클의 오메가와 우성 알파. 모든 조건이 맞아떨어졌지만 석진은 그 0.00001 프로의 확률을 떠올렸다. 뭐 요즘 사회에서 미혼부니 미혼모니 하는 것은 결격사유도 안 됐지만, 하필이면 상대가…. 하필이면 원나잇이라니…! 테스트기의 결과를 기다리는 5분이 500년처럼 더디게 느껴졌다. 그리고 정확히 5분 후. 아침에 틀어놨던 TV에서 교양 프로그램 <클래식 나들이>가 흘러나왔다. 첫 곡은 베토벤의 5번 교향곡. 운명이었다.




아마 오부작일 것 같아요..

아마 격주 연재할 것 같아요...

트위터썰 중 알오물 러트+히트=임신 썰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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