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그래보이지 않지만 두시간이나 고르고 고른 브금..입니당*^^*





망했다

면접장을 나온 태형은 면접 내내 목을 조이던 넥타이를 풀었다. 그동안의 모든 취업 준비가 이곳을 위한 것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니 하필이면 그때 딸꾹질이 나올게 뭐람

다른 곳보다 배로 준비한 면접이었건만 보기 좋게 말아먹었다. 도무지 멈추지 않는 딸꾹질에 면접장을 나와 지하철을 탈 때까지 얼굴이 화끈거렸다가뜩이나 동기들보다 취업이 일 년이나 늦어져 불안한 태형이었다. 딸꾹질은 집에 돌아와 이불에 누울 때까지 이어졌다.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결과야 보지 않아도 뻔할 것이다. 굳이 두 눈으로 불합격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신년이 되자마자 용험하다는 점을 보고 온 복채가 아까웠다 뭐, 만사가 형통해?  형통하기는 커녕 만사가 목구멍으로 튀어나온 것 같았다.

이력서에 쓴 컴퓨터 활용능력 1급은 뻥인마냥 태형은 타자 50도 안 나올 속도로 키보드를 천천히 눌렀다. 이 다음 페이지에 나타날, 이제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읊을 수 있는 문구가 눈에 선했다. 귀하와 같은 우수 인재와 함께 하지 못함을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다음에 더 좋은 기회를 통해 만나뵙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곧 빼곡하게 채워질 문장에 머리부터 벌써 지끈거렸다.  태형의 한숨과 함께 어깨가 축 쳐졌다. 올해 하반기를 못 채웠으니 내년도 백수로 시작하려나. 태형의 약지가 경쾌하게 엔터를 내려쳤다. 

결과는 최종 합격이었다.





입사 후 얼마 안 있어 신입사원 환영회가 열렸다. 말이 환영회지, 몇 명의 입사동기와 선배들의 첫 술자리에서 태형은 주는 대로 받아 마셨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태형은 술을 못했고, 덕분에 신입들 중 제일 먼저 취해 간신히 정신만 붙잡고 있었다. 다시 빈 잔이 채워졌고 태형은 잔을 들었다. 본능적으로 이 이상 마시면 안 된다는 게 느껴졌다. 이걸 마시면 정말 다 놔버릴 것 같아. 하지만 받아든 잔을 내려놓을 수는 없었다. 아직 한 달도 안 된 신입에게 거부권이 있을 리 만무했다. 못 마시면 안 마셔도 돼. 선배는 사람 좋은 얘기를 했지만 냉큼 그러겠노라 할 수 도 없는 노릇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마시고 죽지 뭐 하는 마음으로 잔을 드는 그때였다. 찬 공기 냄새가 났다. 온풍기에 한껏 달궈진 공기가 그 주위만 서늘하게 내려앉는 것 같았다. 서느런 바람 냄새와 함께 텅 비어있던 태형의 옆 자리가 찼다. 옆 자리의 남자는 마치 옷장 깊이 넣어뒀던 새 이불의 감촉 같았다. 술기운에 정신이 몽롱한 태형은 천천히 남자의 이목구비를 살폈다.



, 솜이불.”



썩 찬 느낌이 있지만 보드랍게 감싸는 겨울 솜이불이었다. 남자의 솜이불을 닮아 있었다. 그중에도 무겁게 축 처진 것이 아닌 얇게 틀어진 솜이불. 남자는 태형이 들고 있던 잔을 빼앗듯 받아내더니 단숨에 비웠다. 늦었네. 태형의 앞에 앉아있는 사수가 말을 건넸다. , 마무리 할 게 있어서. 남자는 여태껏 태형이 마시던 잔에 술을 받으며 대답했다. 이제 막 퇴근해 사원증을 빼는 것도 잊은 모양이었다. 김석진. 잘생긴 사진 아래 얼굴만큼 잘생긴 이름 석 자가 쓰여 있었다.



그만 먹여. 얼굴 터지겠다.”

남의 부서 신입한테 엄청 다정한 척 하네.”



사수와 석진이 다시 잔을 부딪쳤다. 단숨에 한 잔을 비운 석진이 태형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새 몇 잔의 술에 몸이 데워졌는지 남자의 양 볼이 따뜻하게 물들었다. 석진은 태형의 얼굴부터 아래까지 스캔하듯 눈을 굴렸다. 검은 눈동자가 천천히 굴러가는 게 꼭 또로록하고 소리가 날 것 같았다.



신입이에요?”

, .”

잘생겼네.”

, .”



태형이 기계적으로 대답하며 석진의 잔에 술을 따랐다. 안 잡아먹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이윽고 부딪히는 유리 소리가 맑았다. 태형은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잘 몰랐다. 상대가 물으니 대답할 뿐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대답을 무시할 만도 하건만 상대는 웃으며 태형의 잔을 대신 마셔주었다. 잔이 채워지고, 비워졌다. 무르익어가는 술자리에서 태형의 얼굴은 더욱 무르익어갔다

보통 첫사랑하면 언제를 떠올릴까. 고등학교 아니면 대학교 때? 김태형으로 말할 것 같으면 바로 지금이었다. 그렇다고 연애를 못 해본 것은 아니었다. 손으로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의 오메가와 베타를 만났지만 어느 정도의 호감과 흥미만 있었을 뿐, 첫사랑이라고 일컬을 상대는 없었다. 걔 어디가 좋아서 만나? 하고 묻는다면 그냥. 하고 대답하는 것이 김태형의 연애였다. 가슴 설레는 연애는 소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중 가장 말이 안 되는 건 첫눈에 반하는 줄거리였다. 사람이 어떻게 첫눈에 반하나. 스물일곱의 김태형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서사는 아주 단순했다. 김태형은 취했고, 술을 못했다. 그리고 김석진은 웃었고, 술을 잘했다.

첫 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태형은 씻자마자 책상에 앉았다. 취기 같은 건 이미 새벽바람에 깬지 오래였다. 아니면 솜이불에 씻겨냈을지도. 자리에 앉아 얼마 전 받은 신년 다이어리를 꺼냈다. 흔한 가죽 디자인이었지만 회사 로고가 새겨진 기념비적인 첫 입사 다이어리였다. 너무 아까워 아직 제대로 쓰지도 못한 그 대망의 첫 장에 태형이 펜을 들었다. 운명. 이건 분명 운명이라고.






V x JIN
샷건웨딩 shotgun wedding
02. 첫눈에 반하기는 힘들어





뭐래?”



운명을 만난 그 다음날부터 태형은 저보다 일 년 먼저 입사한 대학동기인 지민을 잡고 늘어졌다. 처음으로 맡게 된 프로젝트가 어디까지 진행됐냐며 매일 쪼던 과장대신, 이제는 매일 어떻게 됐냐며 묻는 태형 덕분에 지민의 메신저가 새 알림으로 가득했다.



너 귀엽대.”

아 진짜?”



야근 때문에 지민은 가지도 못한 회식에서 제 사수와 무슨 일이 있던 건지, 태형은 지민에게 석진이 좋아하는 색이나 입맛, 향수, 장소 따위를 물어왔다. 처음엔 귀엽다고 생각했다. 예쁨을 받기 위한 (부서는 다르지만, 어쨌든.) 신입의 노력이 가상하다 생각해 지민은 아무 생각 없이 물어봤고, 전해줬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분홍색 넥타이를 매고 온 태형의 모습은 조금 가관이었지만

대학 때도 태형이 고백을 받는 건 많이 봤어도 먼저 고백하거나 누가 좋다고 얘기한 적이 없었기에 꽤 신선하기도 했다. 타인의 3차 성별을 언급하는 건 조금 실례이긴 했지만, 지민이 아는 대로라면 둘은 알파와 오메가였다. , 둘의 조합이 꽤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게 이틀을 이어 삼일, 이제는 한 달이 돼가니 지민은 제발 빨리 둘이 사귀든지 아니면 그냥 차든지 어서 석진이 결정하기를 바랐다.



주말에 태형이네 놀러갔는데, 걔 김치찌개 진짜 잘 끓여요.”

대단하네.”

형이랑 그때 갔던 김치찌개 집보다 더 맛있었어요.”

잘 하나보네.”



처음엔 태형의 이야기에 맞장구도 잘 쳐주던 석진이었는데, 이제는 매일 점심시간마다 이어지는 김태형의 tmi에 슬슬 지쳐가는 모양이었다. 석진의 기계적 반응에 오히려 지민은 마른 침을 삼켰다. 이쯤 되니 걱정이 됐다. 혹시 이 형이 내가 태형이를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그래도 지민의 이야기를 별로 흥미롭게 듣지는 않아도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자신의 할당량을 채운 지민은 오늘도 불이 들어와 있는 태형의 메신저를 열었다.



뭐래?”

너 대단하대.”

아 대박.”



항상 패턴은 같았다. 같이 회사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탕비실에서 커피를 타고, 자리에서 이어지는 잠깐의 수다. 지민이 먼저 꺼낸 태형의 tmi에 심드렁하게 반응하는 석진. 조금 지겹기도 했지만 쳇바퀴같이 굴러가는 직장인의 삶에는 안정된 패턴이기도 했다

하지만 김태형 tmi가 이어진지 백 일하고도 하루째가 되던 날태형이 입사 백일을 기념하며 작은 초콜릿 꾸러미를 돌리기도 한 그 날. 도무지 깨지지 않을 것 같았던 둘 사이의 작은 규칙에 금이 갔다. 석진이 먼저 태형을 언급한 것이다.



근데 걔 말이야.”

?”

나보다 잘생겼어?”



평소와 마찬가지로 시선은 스마트폰에 집중해있었지만 미세하게 구겨진 미간이 석진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나타냈다.



둘 다 잘생겼는데.”

아니 자꾸 사람들이 비교하잖아. 세 살이나 어린 신입이랑 나랑.”

.”

속상해.”



속상해요 형? 저도 그래요. 자리에 돌아온 지민은 새 알림이 가득한 메신저를 로그아웃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그래도, 그래도. 아직까지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폭풍은 이제부터였다.




* * *



걔는 일한지가 세 달이 지났는데 아직도 이걸 틀리면 어쩌자는 거야.”

누구요?”

네 친구.”



내 친구, 태형의 이야기였다. 지민은 조용히 카카오 톡을 켜 친구에게 메시지를 전송했다. 너 형한테 무슨 짓 했어? 평소 카톡 텀은 꽤 긴 태형이라고 생각했건만 보내자마자 진동이 울렸다. 아니. 짧은 대답이었다.



“0을 하나씩 빼먹어서. 그냥 내가 컨펌 하기로 했어.”

부서가 다른데요?”

애초에 우리가 마지막에 서명 들어가서. , 몰라. 위에서 내가 하라는데 뭐 어쩌겠어.”



가뜩이나 야근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석진이다. 야근을 할지언정 특근을 한다고 할 정도로 밤늦게까지 회사에 있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석진이 자신의 일도 아닌, 자기 부서일도 아닌 남의 부서 일을 떠맡게 됐으니 태형이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제 친구의 연애사도 연애사지만 일단 지민은 상사의 기분을 맞춰주는 게 우선이었다. 하지만 상황을 알 턱이 없는 태형의 메시지는 여전했다.



뭐래?”

몰라.”

매일 반복되던 대단원의 김태형 tmi가 막을 내렸다.




* * *




그렇게 며칠은 잠잠했다. 본인의 실수를 전해들은 태형은 (아무도 시키지 않은) 묵언수행을 하며 자신을 반성했다. 석진은 알 턱도 없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냐 싶었지만 온갖 사담과 닦달로 가득했던 메신저가 조용하니 지민도 굳이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이렇게 포기하나 싶었건만, 지민의 평온을 얼마 가지 않았다. 한 삼일정도. 삼일천하가 아니라 삼일평온이었다.


[술 한 잔 하자.]


마침 지민이 불금에 잡았던 약속이 깨진 걸 알기라도 하는 듯, 태형에게 서 온 메시지가 울렸다. 얼마 전 완전히 손을 턴 프로젝트 덕분에 남은 업무도 없는 지민이다. 오랜만에 칼퇴. 그것도 금요일의 칼퇴. 한 주의 마무리를 기다리며 지민이 콧노래를 불렀다

그건 석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몇 주 전부터 클럽 테이블을 예약했다고 오랜만에 불금이라며 지민에게 자랑 아닌 자랑을 했던 석진이다. 분명 지금쯤이면 오늘은 뭘 입고 어디서 뭘 할지 시간대별로 잘 짜여진 일정을 자랑할 만도 한데, 퇴근 10분을 넘기고도 석진은 통 일어날 기미가 안 보였다.



안 가세요?”

? . 먼저 가.”

뭐 남으셨어요? 다 끝나지 않았어요?”

네 친구 꺼.”



아차. 지민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0만 빼먹은 줄 알았더니 오타도 있어. 잡아내느라 죽겠다.”



사수가 퇴근하지 않는데 어떻게 부사수가 그냥 갈 수가 있으랴. 지민은 그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같이 하겠다는 지민을 다음 주에 보자며 강하게 만류하는 석진이 아니었다면, 태형은 아마 퇴근길로 붐비는 이자까야에서 혼술을 해야 했을 것이다. 불금을 야근으로 바꾼 사수를 뒤로 하며 지민은 지금쯤 이자까야에 앉아있을 태형을 떠올렸다태형아, 아마 안 될 것 같다.



* * *



내가 실수하고 싶어서 실수한 게 아닌데.”


고작 생맥주 500 두 개로 테이블에 얼굴을 부비고 있는 친구를 보며 지민은 한숨을 폭 쉬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지. 무슨 죄를 지어서 얘를 우리 회사에 붙이려고 아는 것 모르는 것 죄다 끌어다 팁까지 얹어줬지. 술이 한 모금씩 들어갈수록 점점 테이블과 한 몸이 되어가는 태형을 보며 지민은 스스로를 자책했다.



한번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자.”

지금?”

. 더 이상 질질 끌어봐야. 나 어떻게 생각 하냐고.”

내가?”

난 번호도 몰라!”



사원 이름 검색하면 뜨는 게 전화번호인데. 왜 자신이 물어야 하는지 지민은 알 수 없었지만 술에 취해 우기는 김태형을 이길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지민이 아는 한. 아무래도 지금은 타이밍이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지만, 내 연애도 아니고

지민은 태형이 시키는 대로 카카오 톡을 열었다. 태형이 한 잔 마실 때, 두 잔을 비운 지민이라 태형만큼 취한 것은 아니었지만 손가락이 자꾸만 ㅜ를 ㅗ로 누르고 있었다. 이러다간 태형과 마찬가지로 오타로 엮여 불똥이 튈지도 모른다. 최대한 정신줄을 잡으며 문장을 고쳤다. 바야흐로 시간은 한창 금요일의 밤이 무르익는 943. 지금쯤이면 퇴근했을, 아니 어쩌면 아직도 태형의 오타와 씨름하고 있을 석진에게 메시지를 전송했다.

[, 4층에 김태형 말인데요. 걔 어때요?]



보냈어.”

뭐래?”

보낸 지 1초도 안 됐는데 벌써 답이.”



왔네. 지민은 잠금 화면에 뜬 석진의 답장을 태형과 함께 공유했다. 지민이 보낸 것보다 더 간결한 답장이었다.

[, 존나 별로.]

오직 다섯 글자로 이루어진 14byte의 간략한 텍스트. 그러나 어떤 대답보다 임팩트 있었으며 아주 확고하게 보낸 이의 뜻을 담고 있었다</system: 다음 기회에!>  머릿속에 경고음이 울렸다.

누가 그랬더라.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아 아름답다고. 태형의 첫사랑도 그랬다. 지금까지의 연애는 그냥 연애였다. 오직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관계가 아니라 적당히 시작하고 보는 플라스틱 러브. 서로가 나쁘지 않고 호감도 없지 않으니 한번 만나보는, 그렇게 일정의 수순을 거쳐 이별하는 연애. 戀愛라기보다는 然愛같은 그런 연애

아주 사소한 계기에서 시작한 마음이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상대에게 직접적으로 전하지도 못했지만 좋아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자체가 좋았다. 상대는 내가 좋아하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꼭 드라마나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아 하루하루가 설레고 두근거렸다. 처음이었다. 조금 허무하게 끝나버렸지만, 이렇게 마음을 묻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존나 별로라는 말을 듣고도 모른 척 다가갈 용기까지는 없었다. 차라리 혼자 묻는게 낫지, 정말 차이다가는 회복불가능 상태에 들어갈 것 같았다. 회사의 업무에 익숙해져 갈수록 석진과 엮이는 일도 점차 많아졌다. 그럴 때마다 태형은 더더욱 마음을 감췄다. 여전히 좋아하지만, 좋아하지 않는 척. 여전히 가슴 한편이 간질거리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싫어하는 상대에게 고백 받는 게 얼마나 당황스럽고 더 나아가 기분 나쁜지 잘 알고 있는 태형이었다. 석진의 앞에 설수록 태형은 자신의 마음을 꼭꼭 감췄다. 자신을 위해, 그리고 석진을 위해. 여기서 매듭을 짓는 게 옳은 일이라 생각했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 * *



 

.”



연이은 야근에 태형은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대기업이 괜히 대기업이 아니었다. 높은 연봉과 비례하는 높은 업무 강도. 끝나기라도 한다면 밤 10시라도 나름의 칼퇴였다. 어느 날은 새벽 4시에 퇴근하고 아침 9시에 출근한 날도 있었다. 이제는 평일과 주말의 경계도 모호해졌다. 어느새 시간은 오후 8시를 넘기고 있었다. 부서의 모두가, 아니 어쩌면 4층의 모두가 퇴근할 시간이 돼서야 태형도 퇴근할 희망이 보였다. 조금만 마무리하면 되겠다. 곧 끝이라는 긴장이 풀리자 급 피로가 몰려왔다. 아무래도 커피 한잔을 마시고 10분정도는 눈을 붙여야할 것 같았다

태형은 모두가 퇴근해 아무도 찾지 않을 휴게실로 엘레베이터를 눌렀다. 휴대폰을 열자 상단 바가 오늘이 금요일을 알렸다. 남들에겐 불금이니 뭐니 하는 날이었지만 태형에게는 이미 흐려진지 오래였다. 회사-야근--회사-야근-. 어디 안 놀러가도 좋으니 집이라도 가고 싶다믹스커피를 뜯는 태형의 손길이 퍽 간절했다. 하지만 태형을 반기는 건 폭신한 솜이불이 아닌 텅 빈 휴게실의 찬 공기였다. 20. 알람을 설정하고 딱딱한 바닥에서 잠을 청했다. 거의 이틀을 새우다시피 한 태형이기에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밤을 새워서 정신이 몽롱한 건지 아니면 잠이 들어 나른한 건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아읏.”



때문에 태형은 지금 자신이 잠꼬대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분명 이 휴게실에는 태형 혼자였다. 불규칙적인 생활패턴에 몸이 엉망인지 페로몬마저 뒤엉켜 오메가의 것처럼 된 모양이었다. 꿈이라도 꾸는 걸까. 페로몬은 점점 진해져 아무 것도 먹지 않았음에도 입안이 달았다. 몇 번 오메가를 만난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맘에 든 적은 없었는데. 내 페로몬이라 그런 건지, 텅 빈 휴게실에 가득 찬 오메가 페로몬이 간지러웠다. 텅 빈 휴게실과 페로몬…….

아니, 잠깐만

아무리 컨디션이 엉망이여도 알파인 나한테서 오메가 페로몬이 날 리가 없잖아! 답이 명백한 논제에 잠은 그대로 날아났다. 자신의 잠꼬대라고만 생각했는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태형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뜬 눈에 사방이 캄캄했다. 하지만 곧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의 끝에 인영이 닿았다. 히트 사이클의 오메가. 우성 알파인 태형의 이성을 무너뜨릴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오래있다가는 장담할 수 없었다

빨리 나가야해. 태형이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휴게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문으로 향하는 게 오메가에게 가까워지는 꼴이 됐다. 가까이 다가와 얼굴을 맞대니 오메가의 얼굴이 낯익었다. 낯익다 못해, 너무나 잘 아는 얼굴이었다.



석진 씨?”



덕분에 페로몬은 더욱 짙어졌다. 석진이라는 사실에 흘려지는 우성 알파의 페로몬도, 거기에 반응하는 오메가의 페로몬도 함께.



. 히트 사이클이에요?”



어쩌면 알파와 오메가로서 너무나 당연한 본능적인 끌림일 수도 있겠지만, 존나 별로 사건 뒤로 업무 외에는 마주친 적이 없던 지라 태형은 석진이 꽤 반갑기도 했다. 빨리 나가야하는데, 나가야 하는데. 점점 짙어지는 페로몬은 너무 달다 못해 씁쓸하기까지 했다.



제가 나갈게요. 그러니까 제가 알파라서…….”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알 텐데. 이대로라면 자신까지도 힘들어질 것 같았다. 정말 빨리 나가야하는데, 빨리.



가려면 빨리 가요.”

아니 그게.”

뭐요.”



이성은 어서 나가야한다고 태형을 재촉했지만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아직 석진은 인지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석진이 먼저 태형을 소매를 잡고 있었다. 열에 들떠 손가락 끝까지 힘이 풀린 석진이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힘을 줘 뿌리친다면 쉽게 빠져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석진이었다. 김석진, 이름 세 글자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꽁꽁 싸맸던 감정이 하나 둘, 끈을 풀었다.



놔줘야 가죠.”



잠깐의 정적은 주문이었다. 밀실의 오메가와 알파, 그리고 히트 사이클운명은 마치 우연을 가장해 필연을 연기했다.

 






격주연재한다더니 거의 6개월만에 올리는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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