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안 돼.”



편지 한 통이 석진의 직장으로 날라 왔다. 본인 외에는 절대 개봉 불가하다는 경고가 쓰인 서류봉투에 담긴 등기. 일주일 전 병원에서 기본 건강검진과 함께 임신 여부를 검사했던 결과지였다. 갈색 서류봉투를 들고 화장실 제일 끝 칸으로 들어갔다. 종이 한 장의 무게였지만 왜 이리 무거운지 자꾸만 놓칠 뻔한 석진이다. 문을 잠그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저 오늘부터 교회 제대로 갈게요. 매년 송구영신예배만 갔지만, 이번 주부터는 매 주 헌금도 제대로 낼게요. 손으로 봉투 안에 결과지를 천천히 꺼내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제발, 제발!

석진은 결과지를 찢어 갈기갈기 변기에 내렸다. 그 옛날, 시험을 망쳤던 그때처럼. 아무래도 종교를 바꿔야할 것 같았다.

자리로 돌아온 석진은 하던 업무를 마저 하기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아보였다. 평소와 다름없다 여기며 석진은 엔터를 쳤다. 다만 평소와 다른 것이 있다면, 뻔히 easy cut 이라고 쓰여 있는 믹스커피를 반대로 뜯어 봉투가 터졌다던가, 이면지를 반대로 넣고 100부를 복사했다던가, 본인 싸인은 넣지도 않은 채 교육 이수 자료를 돌렸다던가 하는 일이었다. 상황이 이쯤 되니 석진의 컨디션이 평소와 다르다는 건 석진 빼고 12층의 모두가 알았다.



, 무슨 일이에요?”

? 아니.”

근데 오늘 왜 그래요. 몸이 안 좋아요?”



몸이야 너무 좋지. 너무 좋으니까 그렇게 원 샷 원 킬로 끝났겠지. 석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냐.”

그럼 끝나고 같이 맥주 한 잔 할래요?”

아니, 괜찮아. 신경 써줘서 고마워.”



평소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던 석진이다. 제안을 듣고 1초정도는 갈까 싶었지만 왠지 그러겠노라 할 수가 없었다. 아직 부풀기는커녕 조짐조차 없는 마른 배에 손을 올렸다. 진짜 싫다. 그대로 엎드려 책상에 볼을 부볐다. 너를 어떡하면 좋지.

하지만 혼자 삽질해봤자 나아지는 것도 없었다. 이번 주는 풀야근을 하려고 했지만 도저히 업무에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될 대로 되라지. 석진은 퇴근하는 지민을 돌려 세웠다.

한 잔 하러 가자.” 싫다고 했을 땐 언제고 그새 마음을 바꾼 석진에 지민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사수의 결정에 토를 달아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아는 지민이었다. 다행히 저녁 약속도 없는 날이라 지민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갈지 고민할 필요도 없이 둘은 항상 가던 오뎅바로 향했다. 월요일부터 술을 마시는 사람은 적었기에 평소보다 한적했다.



여기 생맥 하나 주세요.”

하나요?”

난 안 마셔.”



먼저 맥주를 마시러 가자고 한 사람은 분명 석진인데 마시지 않겠다니, 지민이 당황해 되물었다.



아니, 못 마셔.”



같이 마시자더니 그냥 지민 혼자 마시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뭐야, 이 형. 아니 술이라도 안 마실 거면 얘기라도 하던지 오뎅 꼬치 하나들고 멍하니 바라보며 고사만 지내고 있는 석진이다. 김석진이 오뎅을 들고도 먹지 않다니. 오늘 회사에서도 그렇고 분명 뭔가가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형 어디 아파요?”

아니.”

그럼 뭐 있어요?”



뭐가 있냐고? 있기야 있지. 지금 내 배 안에 있지.



왜요, 뭔데요.”

아니 그게.”

큰일이에요?”



큰일이지 그럼, 큰일이고말고. 석진은 한 입도 베어 물지 않은 오뎅을 내려놨다. 그러자 지민의 표정이 더 심각하게 굳어갔다. 그 김석진이, 그렇게 좋아하던, 심지어 이 오뎅바에서 제일 좋아하는 치즈오뎅을 들고도, (하나밖에 남지 않아 지민은 못 먹었다.) 먹지 않고 그대로 내려놓다니! 아무래도 예삿일이 아니었다.



왜 그래요, .”

지민아 나.”

, 말해 봐요. 제가 들어줄게요.”



, 우리 지민이 너무 착해. 석진은 괜히 울컥하는 마음에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이렇게 감정변화가 격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오늘따라 변덕이 심한 석진이다. 아이가 생겼다고 호르몬의 영향을 받는 걸까. 하지만 아직 2주밖에 안된 세포일 뿐인데. 에라, 모르겠다. 석진은 두 눈을 꼭 감고 질러버렸다. 기쁜 일은 나늘수록 배가 되고, 고민은 나눌수록 줄어드는 법이다.



나 임신이래.”

뭐요?”

임신.”

제가 지금 잘못들은 거 아니죠? 임신이라뇨?”



석진이 오메가인 걸 모르는 건 아니니 임신했다는 자체에는 크게 놀랄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민이 알기로는 석진은 지금 만나는 사람커녕 썸 타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임신이라니? 대체 누구랑, 어디서, 언제, 무엇을, 어떻게, ?



형 지금 만나는 사람 있어요?”



석진이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도 알아요?”

아니, 근데 난 낳을 생각 없어.”



설마설마 하던 게 맞아떨어지니 지민은 절로 한숨이 쉬어졌다. 반 정도 남은 맥주잔을 들어 그대로 들이켰다.



난 김태형이랑 결혼할 생각도 없고, 혼자 애 키울 생각도 없어.”

? 태형이요?”

…….”

형 김태형이랑 잤어요?”



아까부터 오뎅 하나 들고 김태형, 세 글자만 생각하고 있던 석진이었다. 임신 사실을 말해도 그 상대에 대해서는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저도 모르게 저질러버린 실수에 입을 가렸다. 당황한 석진의 얼굴에 지민이 와. 하며 맥주 한 잔을 더 시켰다. 그리고 단숨에 반을 들이 키고 나서야 조금 진정이 된 모양이었다.



김태형 그 미친놈은.”



당장이라도 태형에게 전화해 뭐라 할 기세로 휴대폰을 꺼내자 석진이 손을 뻗어 하지 말라며 지민을 제지했다.



아니 어떤 미친놈이 원나잇에 피임도 안 해요!”

, 내가 하지 말자고 했어!”



석진이 낮은 목소리에 힘을 줬다.



히트 사이클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고.”

아니 혀엉.”



지민이 두 눈을 감은 채로 깊게 한숨을 쉬었다. 지민은 한참 동안 감은 눈을 뜨지 않았고, 석진은 아까 내려놨던 치즈 오뎅을 조금씩 먹으며 지민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도 태형이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

어쨌든 둘의 아이잖아요.”

그치만 김태형은 날 싫어하잖아.”



의아함에 지민의 이마가 구겨졌다.



태형이가 형을 싫어한다고요?”

.”

어느 대목에서 그렇게 느꼈어요?”

나 걔랑 업무 외에 얘기 해본 적 없는데. 그리고 되게 딱딱하게 굴어.”

아니 그건 형이.”



존나 별로라고 하니까 얘가 삐진 거잖아요. 지민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가 말하지 않았는데 자신이 하는 건 아닌 것 같아 말을 아꼈다.



어쨌든, 낳든 안 낳든 태형이도 아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그래.”

약물을 하든, 뭘 하든 보호자도 있어야 하잖아요.”

그건 너가 있잖아.”

그렇긴 한데. 그래도 당사자는 알아야죠, ?”



지민이 두 눈을 깜빡이며 석진을 달랬다. 둘의 실수였으니 혼자 묻는 건 역시 아닌 걸까. 석진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어.”



* * *

 


석진은 집에 돌아와 피곤했던 흔적을 모두 씻어냈다. 갓 샤워를 마친 탓에 바디워시 향이 방을 채웠다. 손을 뻗어 걸어두었던 샤워가운을 걸쳤다. 허리를 조이고 머리를 부비던 수건을 빨래 통에 던졌다. 곧 폭신한 침대에 등을 감쌌다. 뭐라고 보내야할까. 손에는 수건 대신 휴대폰이 들려있었다. 석진은 카톡에서 태형을 찾아 한참동안 텅 빈 화면을 지켜봤다. 회사 메신저 외에는 한 번도 얘기를 나눠본 적이 없는데 첫 문자가 임신 사실을 알리는 거라니. 제가 사고 쳐서 이번에 결혼하게 됐네요, 하는 내용도 아니고 그쪽이랑 사고 쳐서 애가 생긴 것 같네요 따위의 내용이라니. 선뜻 자판을 누를 수가 없었다.

[김태형 씨 내일 시간 돼요?]

단순해 보이지만 오랜 시간에 겨우 완성한 문장이었다. 시간 될까요?는 너무 비굴해보이고, 시간 있어요?는 너무 꼬시는 것 같고, 그렇다고 좀 봅시다는 아닌 것 같고. 전송을 누르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보내고도 문제였다. 혹시라도 읽씹 하는 건 아니겠지? 메시지를 보낸 지 1분도 되지 않았건만 속이 탔다.

[.]

그러나 석진의 예상과 다르게 카톡은 금방 1이 사라졌고 답장도 그랬다.

[630분쯤 사거리 쪽 스타벅스에서.]

[.]

이번에도 빨랐다.




  


V x JIN
샷건웨딩 shotgun wedding
03. deer in the headlights


 



어제 태형의 답장은 빨랐지만 문제는 오늘의 석진이었다. 퇴근 시간은 6, 약속 시간은 630. 그리고 지금은 650. 석진은 아직도 모니터 앞에 앉아있었다. 빨리 나가야 하는데 오늘따라 부장님이 퇴근할 기미가 안 보였다. 항상 610분이면 나가는 양반이.



[조금 늦을 것 같아요.]

[.]



휴대폰을 끼고 사는 타입인지 답장은 빨랐다. , 빨리 가야하는데. 석진은 720분이 돼서야 겨우 회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스타벅스까지 8. 평소라면 10분이면 올 거리가 사고 때문에 꽉 막혀 도로가 밀리는 것은 물론, 주차할 곳도 마땅치가 않았다. 게다가 신호는 신호대로 다 잡히기까지, 생각보다 너무나 늦어졌다. 석진의 발걸음이 미안한 마음만큼 빨라졌다.



미안해요. 일어날 수가 없어서.”



석진은 먼저 와 있는 태형을 찾아 그의 앞에 앉았다. 사람의 붐비는 곳이었지만 태형을 찾는 건 쉬웠다. 제일 잘생긴 사람을 찾으면 됐으니까.



하도 안 오기에 엿 먹이는 건줄 알았어요.”



태형이 바닥을 드러낸 자바칩 프라푸치노의 빨대를 물었다.



저 그렇게 한가하지는 않아요.”



미안함에 무료주차장까지 가지도 못하고 유료주차장에 세우고 왔건만 상대의 날이 선 반응에 석진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늦고 싶어서 늦은 게 아니었는데.



연락도 안 받으시고.”



석진은 그제서야 제 휴대폰을 꺼냈다. 무음으로 가방 안에 넣어 둬 몰랐는데, 태형에게서 메시지가 두 개나 와있었다.



미안해요. 몰랐어.”

왔으니까 됐어요.”



태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가요?”

뭐 마실 거예요?”

커피 빼고.”



먼저 보자고 한 것도 석진이고, 늦은 것도 석진인데 태형이 메뉴를 물었다.



커피 안 마실 거면 왜 커피숍에서 보자고 했어요?”

할 얘기가 있어서. 금방이면 돼요.”

무슨 할 말인데요?”

그게.”



말해야 하는데, 자꾸만 목이 탔다.



물 한잔만 마시고 얘기할게요.”



태형을 뒤로하고 카운터 쪽에 비치된 바틀에서 물을 따랐다. 별 것도 아닌 얘기였다. 그날 일로 사고가 나서 너랑 내 애가 생겼는데 난 낳을 생각도 없고 아직 2주밖에 안됐으니 약물 처방받으면 간단할거니까 아무 걱정 말라고, 그래도 일단은 말해야 할 것 같아 불러낸 거라고. 석진은 물을 마시며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이제 됐다. 자리로 돌아가려 컵을 내려놓는데 앉아있는 줄만 알았던 태형이 갑자기 손목을 잡았다.



이리 와서 이거 마셔요.”



그의 손에는 얼음 컵과 탄산수가 담긴 쟁반이 들려있었다.



아니, 나는 괜찮은데.”

한 잔만 마신다더니 지금 여섯 잔 째잖아요. 그냥 이거 마셔요.”



내가 그새 여섯 잔이나 마셨나. 카운터를 슥 보니 스텝이 이쪽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진상이 된 듯한 기분에 끄덕이며 태형의 뒤를 따랐다. 자리에 앉자 태형이 바틀을 열었다. 탄산 소리가 경쾌했다.



무슨 말이기에 그렇게 목이 타요?”

…….”

그날 그렇게 도망치고 간 이후로 처음 보는 것 같네요.”

도망이라니.”



태형이 가방에서 작은 봉투를 꺼냈다.



그날 놓고 간 넥타이에요. 비싼 거던데, 이것도 까먹고 갔으면 도망간 게 맞잖아요.”



그 넥타이는 석진이 제일 아끼는 넥타이었다. 큰 맘 먹고 산 명품 브랜드의 신상. 술 먹고 어디다 떨궜다고만 생각했는데 하필이면 김태형의 집이었다니. 저걸 저기다 놓고 온 것도 모를 만큼 황급하게 뛰쳐나갔으니 도망은 도망이었다.



그래서, 뭔데요.”



얼음 컵의 뚜껑까지 끼워 맞춘 태형이 빨대를 꽂아 석진 쪽으로 건넸다. 빨리 말해야하는데 입술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다시 입안이 말랐다. 석진은 태형이 건넨 컵을 들고 스토로우를 쭉 빨아 한 번에 반이나 들이켰다.



지금 저랑 장난하시는 거 아니죠.”

.”



꽤 비장하게 얘기를 꺼냈다. 톤이 낮았지만 작은 목소리에도 태형은 석진의 입술에 집중했다.



임신했대요.”

?”



물을 마시고 있던 것은 석진이었는데 갑자기 태형이 사레가 들린 듯 기침을 해댔다. 제대로 숨을 잘못 삼켰는지 연신 기침을 하던 태형은 도저히 안 되겠는지 잠시 나갔다 오겠다는 제스처를 취하고는 카페를 나섰다. 찬 바람을 맡고 다시 들어온 태형의 얼굴은 꽤 심각해보였다.



. 임신, 임신 했다고요.”



자리에 앉은 태형이 새기기라도 하듯 되뇄다. 자신보다 더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모습에 석진은 이상하게 마음이 담담해졌다.



.”

그런데 그걸 왜 저한테 말해요?”

?”



그것도 잠시, 태형의 대답에 석진은 마시던 탄산수를 내려놨다. 아니 애 아빠한테 말하지 그럼 누구한테 말해? 애초에 낳을 생각도 없었지만 그래도 알아야할 것 같아서 일부러 불러냈건만 태형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그날 오첩반상까지 차리며 먹이던 남자는 어디 갔단 말인가.



뭐요?”

그러니까 그걸 왜 나한테 말하냐고요.”

왜요. 말하면 안 돼요?”

김석진 씨, 오늘 저 놀리려고 부른 거 맞죠.”

보자보자 하니까 지금.”

그런 게 아니면 굳이 저한테 그 얘기를 왜 합니까?”



자신도 책임감이 없지만, 더한 태형의 반응에 어이가 없었다. 괜히 욱해져 석진이 언성을 높였다.



아니 나도 낳을 생각이 없.”

내가 김석진 씨 좋아하는 거 뻔히 알잖아요.”

…….”

뻔히 알면서 그러는 거, 그러려니 했어요. 내가 성에 안 차는구나 해서.”



지금 이 남자가 뭐라고 하는 거지?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어 석진은 태형의 말을 들으면서도 고개를 갸우뚱 저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 애를 임신했다는 사실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잖아요.”

?”

안 낳을 거면 뭐, 나보고 보호자라고 해달라고 온 거예요? 말할 사람이 주변에 그렇게 없었어요?”

김태형 씨.”

왜요. 지민이는 안 해준대요?”

잠깐, 잠깐만요.”

설마 박지민 애예요?”



왜 얘기가 그렇게 튀어! 대체 무슨 망상을 하고 있는 건지 흥분한 태형이 좀처럼 가라앉을 기미가 안보였다. 일단 태형의 망상을 멈춰야할 것 같아 석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감정을 컨트롤 할 수 없는지 모두가 있는 카페에서 태형이 페로몬을 진하게 풀었다. 그러자 카페 분위기가 급속도로 가라앉았고 베타를 제외한 오메가나 알파들은 이쪽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우성알파의 위협적인 페로몬에 석진도 팔에 소름이 돋았다.



태형 씨, 여기 공공장소인데 페로몬 좀.”



석진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태형이 한숨을 깊게 쉬더니 석진이 남긴 탄산수를 그대로 들어 마셨다. 곧 페로몬도 진정됐는지 카페 안은 다시 아까와 같은 분위기를 되찾았다.



어디까지 얘기했죠.”

그러니까.”

지민이 애 임신한 것 까지 얘기했죠? 그래서 어떻게 할 거예요.”

안 낳을 거예요.”

그럼 내가 어떻게 해주길 원해요.”



이쯤 되니 석진은 슬슬 태형의 머릿속을 꺼내보고 싶었다.



그냥 알기는 해야 할 것 같아 불렀어요.”

…….”

김태형 씨 애니까.”



석진의 말이 끝나자 아까의 사레에 이어 이번에는 태형의 딸꾹질이 시작됐다. 무표정한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갔다. 태형은 딸꾹질을 하며 석진의 얼굴과 석진의 배, 그리고 다시 얼굴을 번갈아 봤다.



그때 약 먹는다고 했잖아요.”

못 먹었어요.”

?”



히끅. 태형이 딸꾹질에 어깨가 떨렸다.



그러고 갑자기 일이 생겨서. 내가 안 먹긴 했지만 그렇게 그 일 한 번에 생길 줄은 몰랐어요.”

그때는 석진 씨 히트 사이클이었잖아요.”



태형의 말에 석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들릴지 안 들릴지 알 수 없는 목소리로 작게 혼잣말을 했다. 그렇긴 해도 진짜 그렇게 될 줄은 몰랐지. 둘 사이에 잠깐의 정적이 돌았다. 그렇지만 오가는 대화가 없던 것이지 아예 침묵은 아니었다. 아까부터 태형의 딸꾹질이 좀처럼 끝날 줄을 몰랐다.



저 잠깐 화장실 갔다 올게요.”

그래요.”



의자에서 일어난 태형은 화장실 푯말을 따라 몸을 틀었다. 그렇게 3m 쯤 이동했을까. 태형이 자리로 돌아왔다.



, 어디 가면 안 돼요?”

알겠어요.”

금방 올게요.”

알겠다고요.”



석진의 확답을 듣고서야 태형이 다시 뒤를 돌았다. 혼자 남은 석진은 태형이 다 마신 빈 얼음 잔을 스토로우로 돌렸다. 딸꾹질을 멈추러 간 건지, 뭐 하러 간 건지 금방 온다던 태형은 꽤 오래 걸리는 모양이었다. 아니 왜 이렇게 안 나와. 나 좋아한다고 해놓고.



……?”



스토로우를 돌리던 석진의 손이 멈췄다. 멍 때리고 있던 시선이 갈 곳을 잃은 듯 보였다. 석진은 텅 빈 앞자리를 보며 아까의 일을 회상했다. 분명 그랬다. 자기가 좋아하는 거 뻔히 알지 않냐고. 그럼 대체 언제부터?

태형에 대해서는 나름 잘 알고 있던 석진이다. 별로 궁금하지 않아도 지민이 매번 얘기해 줬으니까. 그냥 그 정도로 친한가보네 하고 넘겼는데, 그럼 그게 다 일부러 하는 거였단 말인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항상 칭찬 일색의 일화들이긴 했지만,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겼는데. 갑자기 얼굴이 달아올랐다. 분명 지민이 그 tmi를 늘여놓기 시작하던 때가 있었다. 그게 언제부터인지 석진이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잡고 있던 스토로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환영 회식. 분명 그 날 이후부터였다. 그렇다면 김태형은.



미안해요, 딸꾹질이 좀처럼 안 멈춰서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요열나요?



나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좋아한 거야?




* * *




 

화장실에서 돌아온 태형은 사람이 달라보였다. 아무리 화장실 갈 때 마음 다르고 올 때 마음 다르다지만 아까는 똥 씹은 표정으로 잔뜩 미간을 굳히고 있던 태형이 자꾸만 입 꼬리를 올렸다.



제 애라고요?”

.”

석진 씨랑 제 애.”

.”

지금 석진 씨가 가진 게 제 애라는 거죠.”

그렇다고요.”

그러니까 지금 석진 씨가 내 애를 가졌다는.”

, 맞다고요. 김태형 씨랑 내 애라고!”



자꾸만 같은걸 반복하는 태형이 답답해 석진은 그만 회사 근처 카페라는 것도 잊고 목에 힘을 줬다. 아차 싶어 입을 가렸건만 눈앞의 태형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 실실 웃고만 있었다.



. 제 애.”

김태형 씨, 그러니까.”

정말 운명인가 봐요.”

?”

석진 씨랑 저 말이에요.”



태형은 이제 실실대는 게 아니라 웃음을 주체할 수 없는 사람처럼 광대가 올라갔다. 석진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두 눈을 깜빡이는 것뿐이었다. 지금 뭐라는 거야? 20분 전만 해도 잡아먹을 듯하던 사람이 갑자기 무슨 운명을 얘기하고 있어.



아니 김태형 씨.”

, 석진 씨.”

뭔가 착각을 하시는 거 같은데, 저는요.”

.”

안 낳을 거예요.”

왜요?”



태형이 정말 이해가 안 간다는 순수한 얼굴로 답했다.



아니 당연하잖아요.”

뭐가요.”

미혼에 낳아서 뭐해요.”

그럼 결혼해요.”



갑자기 결혼 얘기는 왜 나오냐고, 지금.



뭔 결혼이에요. 내가 김태형 씨랑 왜 결혼을 합니까.”

그럼 안 합니까?”



너무나 당당한 말투라 누가 틀린 건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럼 우리 애는요.”

아니 안 낳는다니까요.”

왜요.”



뭘 자꾸 왜요, 왜요래. 지금 김태형 배 참을성 대회라도 하는 거야 뭐야? 인생에서 말이든 행동이든 반복하는 걸 가장 싫어하는 석진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석진은 태형의 반응에 들으라는 듯 한쪽으로 입 꼬리를 올리며 비아냥거렸다.



내가 김태형 씨 애를 왜 낳습니까.”

생겼잖아요.”

사고잖아요.”

그 날 콘돔하지 말자고 한 건 석진 씨잖아요.”

그건 히트 사이클이라 이성이.”

게다가 내가 굳이 밖에 한다고 해도 못 빼게 한 게 누군데요.”

…….”

그렇게 큰소리치면서 알아서 약 먹겠다고 신경 끄라고 도망치듯 가놓고, 이정도면 뭐가 사고에요, 사고가.”



망할 오메가 페로몬. 망할 김태형의 우성 페로몬. 왜 너는 하필 우성이라 내 이성을 몽땅 싸그리 정지시킨 건데. 반박하고 싶었지만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석진 씨, 생각해봐요.”



태형이 테이블 위로 뻗어 석진의 손을 맞잡았다. 꿈같은 하룻밤을 보내고 신데렐라처럼 유리구두 대신 명품 넥타이를 두고 간 석진이었다. 그 뒤로 돌려주려 했지만 그날 밤을 없던 것처럼 행동하는 석진에 태형도 별 방도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별로였나, 태형은 태형대로 상처 입었었다. 그날 밤은 분명 좋았는데. 확고하게 선을 긋고 자신에게서 도망쳤던 석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불러내 임신을 했다니 태형은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나 싶었다. 자신과의 하룻밤에는 치를 떨 듯 가놓고 아이가 생겼다는 통보라니. 자신과의 아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알아서 피임약도 먹겠다고 큰 소리도 쳤으니까. 그렇다면 다른 사람과 아이를 가졌으니 너는 이제 나를 포기하라고 돌려 말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 아이라니. 당신과 나의 아이. 정말 운명이라는 게 있나 싶었다. 한번 전체의 고작 2할인 알파와 오메가가 같은 회사의 휴게실에서 히트 사이클로 엮일 확률을 생각해보자. 이게 운명이 아니면 무엇을 운명이라고 부른단 말인가? 인연의 형태란 여러 가지이다. 입맞춤에서 시작되는 관계도 있고, 원나잇으로 시작하는 관계도 있다. 하물며 아이가 생겨서 시작하는 관계도 있을 수 있는 것 아니겠다고 태형은 생각했다

태형은 충분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직 1년차지만 앞으로의 비전도 괜찮았고,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누나 덕분에 집안에서도 흔쾌히 반길 일이었다. 지금 살고 있는 오피스텔이 둘이 살기에 충분하니 집을 합치는 것도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석진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있었다. 태형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태형은 석진을 아주 잘 알았다.



석진 씨랑 내 애잖아요?”

그쵸.”

얼마나 예쁘겠어요.”

?”

석진 씨랑 내 얼굴인데, 애가 좀 잘생기고 예쁘겠냐구요.”



보통 이런 얘기를 들으면 이게 뭔 소리냐고 넘기겠지만 김태형이 아는 김석진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김석진은 자기 얼굴에 꽤나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태형 또한 그랬다. 괜히 4층의 걔와 12층의 걔가 아니었다.



내 얼굴이랑 태형 씨 얼굴.”

.”

예쁘겠네요.”

그렇죠.”

근데 무슨 애를 얼굴 보고 낳아요.”



하지만 석진은 이성적이었다.



그리고 아플 거고.”

아파요?”

아니, 지금 말고.”



어디가 아프냐며 자리에서 일어나 석진을 살피려는 태형을 간신히 말렸다.



나 아플까봐 귀도 안 뚫었는데.”

.”



석진의 말에 태형이 고개를 푹 숙였다. 양 어깨가 잘게 떨리는 게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비웃습니까?”

, 아니에요.”



태형이 손사레를 치며 석진과 다시 눈을 맞췄다. 이 남자가 이런 남자였나 싶을 정도로 얼굴에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원나잇 사건 후 매번 자신에게 무뚝뚝했던 태형이다. 때문에 석진도 더 공적으로 대하기도 했지만. 감정에 솔직한 태형에 심장이 간지러웠다.



귀여워서요.”



솔직해도 너무 솔직한 말이었다. 석진은 고백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얼굴이 훅 달아올랐다. 괜히 민망해 텅 빈 얼음 컵의 빨대를 물었다.



어쨌든 우리 좀 더 생각해봐요. 어린 나이에 사고도 아니고, 서로 책임질 수 있잖아요. 석진 씨 혼자 만든 애도 아니고. 우연도 아니고 거의 필연인데. 일단 석진 씨가 우리 집으로 들어올래요? 아니면 내가 가도 되고.”



차근차근 하나하나 하다보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우연을 필연으로 그리고 운명으로 말이다.



싫은데요.”



아직은 조금 멀어보지만…….





미국은 땅이 워낙 넓다보니 깊은 숲속이나 공원 같은데서 사슴이 갑자기 뛰어나오게 됩니다. 교통표지판 중 사슴이 자주 나온다는 표지판도 있습니다. deer in the headlights 는 (밤에) 헤드라이트를 켜고 차를 몰고 가는데, 갑자기 헤드라이트에 사슴이 보인다라는 말입니다. 갑자기 사슴이 보이게되면 많이 놀라겠죠 결국 많이 놀라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deer in the headlights 라고 표현합니다.

라고 네이버 지식in에서 하네요. 디어인더헤드라이트는 제가 좋아하는 아울시티 노래인데.. 아주 귀여워요. 가사도 귀여워요 나는 주차장에서 안녕했을 뿐인데 갑자기 후추 스프레이에 맞는 내용...

아 그리고 태형이가 신입이긴하지만 석진이도 아직 사원2년차라 석진 씨라고 부르고 있어요!

선배라고 해도 되겠지만 태형이가 석진 씨하고 부르는게 좋아서.. 어차피 부서도 다르고.. 지민이보다 6개월정도 먼저 들어왔는데 석진이는 다른곳에서 1년정도 있다가 입사했다는 설정입니다!


🐱 봐주셔서 감사해요🐹 


'연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뷔진] 샷건웨딩 05-1  (2) 2018.01.19
[뷔진] 샷건웨딩 04  (4) 2018.01.17
[뷔진] 샷건웨딩 02  (1) 2017.07.17
[뷔진] 샷건웨딩 01  (6) 2017.06.27
[정진뷔] 에로스 콤플렉스  (2) 2017.02.1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