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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형x석진x지민

패전국 외전









날이 밝았다.

 

전 날의 일이 무색할 만큼 다시 또 하루가 시작됐다. 고요한 담장 사이로 햇살이 들어왔고 그 새로 보이는 왕부는 분주해보였다. 어느 새 십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나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작년에 핀 꽃이 오늘 다시 피었고 어제 분 바람이 오늘도 불었다. 모든 게 달라져 있는 듯 했으나 그대로였으며, 그대로인 듯 했으나 달라져 있었다. 하나 둘 잠에서 깨는 이른 시간에 왕부의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누군가 재빠른 걸음으로 궁주의 처소로 들어갔다.

 





궁주님. 태친왕부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궁주라 불린 여성은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패어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매끈한 피부는 그녀의 지위를 나타냈으며 호선을 그리는 입가를 따라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세월의 선은 그녀의 성품을 나타냈다. 아침부터 이리 야단이냐며 궁주는 어린 시종을 탓했으나 노여움은 없었다. 시종은 소매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궁주에게 전했다. 궁주는 은으로 만들어진 지칼을 꺼내 밀봉된 봉투를 잘랐다. 안에는 곱게 접혀진 편지가 들어있었다.

 






증조 할머님께.

 

할머님, 강녕하신지요.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할머님께 너무 오랜만에 붓을 드는 것 같아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앞으로 더 자주 쓰도록 하겠습니다. 태친왕부에는 올해도 어김없이 황궁보다 먼저 꽃이 피었습니다. 할머님께서 계신 북쪽은 아직 꽃망울은 멀었을까요?

 

얼마 전 아버님의 십주기(十週忌)를 지냈습니다. 벌써 십 년이라니 시간이 참 빠릅니다. 이번에는 고모님들의 도움 없이 제가 스스로 준비하였답니다. 처음 제가 주관하였는데, 이것 저것 신경 쓸 것이 많은 탓인지 올해는 아버님 앞에서 울지 않았습니다. 고작 다섯 살 밖에 먹지 않았을 때지만 아직도 저는 전장으로 향하시는 아버님의 얼굴이 선명합니다. 항상 곧 돌아오겠다며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는데 그 날의 아버님은 그저 저를 안아주는 것이 다였습니다. 아버님도 어렴풋이 아셨던 걸까요, 당신이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 며칠 전에는 황궁에 입궁을 했었습니다. 저의 혼인 문제때문인데벌써 제 나이는 혼기가 꽉 찬 열 다섯인데, 황상께서는 저를 혼인시키실 생각이 없으신 듯합니다. 할머님께서 한번 황상께 여쭈어봐주실 수는 없는지요. 이래서 안 된다, 저래서 안 된다며 매번 퇴짜만 놓으십니다. 황궁과 왕부의 공주들 중 이 나이에 혼인하지 않은 공주는 저 뿐인데……. 어째 친 따님보다 저를 더 곁에 두려 하시는 것 같습니다. , 이 말은 못 본 것으로 해주세요.

 

이번 입궁 때는 재밌는 일이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제 할머님과 어린 시절의 아버님이 그리워 화청전에 들렸사온데 그곳에 황상께서 계셨습니다. 제 할머님이 돌아가신 후 비어있는 궁인데 왜 그곳에 황상께서 계셨을까요? 그것도 아무도 없는 침전에 계셨는데불경하옵게도 용루(龍淚:왕의 눈물)를 본 것 같기도 합니다. 소녀의 착각이겠지요? 제가 들어가니 후궁의 주인이신 황상께서 오히려 놀라시어 제가 더 몸둘 바를 모를 정도 였답니다


황상께서 계신 줄 모르고 들어가 혼날 줄 알았는데 그냥 저에게 이 곳에 가끔 오냐 물으셨습니다. 하여 그렇다 대답하자 그럼 이곳에 귀걸이 한 짝을 본 적 없냐 다시 물으시어 그렇다 대답하자 알겠다며 그대로 화청전을 나가셨습니다. 텅 빈 화청전에서 황상의 것을 잃어버리셔서 찾고 계셨던 걸까요? 혹시 소녀가 그것을 가져갔다 생각은 하지 않으시겠지요? 그런데 황상께서는 항상 귀걸이를 한 쪽만 하고 계신데 할머님은 그 연유를 아시는지요.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아 궁금해 황상께 여쭈어 봤더니 그저 웃으시기만 했습니다.

 

열흘 정도 시간이 흐르면 이제 북쪽에도 꽃이 만발하겠지요. 아버님과 매년 가던 할머님의 궁이 그립습니다. 이번에는 꼭 봄에 가 뒷 산에 만발한 꽃을 할머님과 함께 보고 싶습니다. 곧 갈테니 저를 기다려주셔요.

 

그러고 보니 할머님께 여쭈어 보고 싶은 것이 생각났습니다. 저번 겨울에 갔을 때 할머님의 궁에서 저보다 어린 사내 아이를 만났답니다. 그 곳에 제 나이 또래의 아이가 없는 것으로 아는데누군지 궁금했지만 곧 뛰어가 묻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그 아이의 얼굴이 눈에 아른거립니다. 이런 말을 하면 할머님께서 웃으실지 모르겠지만, 아버님의 어린 시절 초상화와 똑 닮아 있어서……


그 아이는 누구인가요?

 






궁주가 편지를 다 읽어갈 때쯤, 궁주의 처소로 사내와 열 살 정도 돼 보이는 어린아이가 들어왔다. 궁주는 익숙하다는 듯 자리를 마련해 그들을 앉히고 차 한잔을 내왔다. 밤새 평안 하셨냐고 묻는 사내의 물음에 궁주는 그저 웃었다. 어느새 동쪽 하늘 높이 떠오른 태양이 궁 안까지 빛을 비추었다. 그 빛에 반사돼 사내의 귀걸이가 반짝였다. 사내의 귀걸이는 양 쪽이 달랐는데,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평안하구나.”

 

새로운 하루의 시작이었다.













<후기>

패전국 그 뒤의 이야기 입니다. "딸은 어디갔냐는." 댓글을 써주셔서 모티브를 얻은 내용이기도 합니다ㅎㅎ 한시간 만에 빠르게 써내렸네요... 그만큼 짧지만요..(쭈굴


공주는 태형과 함께 환궁했지만 전장터에는 따라가지 않고 태친왕부에 남았습니다. 태친왕이 딸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만, 딸의 주변에는 고모와 이모들, 그리고 지민이 지켜줄 거라 생각했을 것 같아요. 태친왕이 딸을 두고 죽음을 택한 것은 단순히 석진만을 생각한 결정이 아니라, 석진 아니면 자신 둘 중 하나는 죽지 않으면 모두가 역적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석진과 딸 모두를 지킨 결정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지민은 태친왕이 그런 결정을 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중간 중간 암시했지만 둘은 어릴 때 사이가 좋았지만 선황의 황후와 귀비 사이의 총애때문에 멀어진 사이이고 또 적통의 지민보다 후궁 소생의 태친왕을 더 아낀 탓에 지민은 아마 어머니로부터의 압박과 아버지에 대한 갈망이 열등감으로 나타났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민이 태형에게 갖고있는 감정은 증오가 아니라 애증이라, 아마 지민은 다른 형제들은 모두 없앴지만 태친왕만은 그러지 못한 것이 愛때문이고, 하지만 홀로 남은 고통을 준 것이 憎이라 생각합니다. 석진에 대한 것도 태친왕에대한 우월심리와 호기심이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지민도 태친왕의 결정에 석진보다 더 크면 크지 적지않은 충격을 받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지민의 테마곡으로 고른 "네가 죽는 것도 보고싶어."는 사실 태친왕을 향한 것인데, 내 손으로 너를 죽일 수는 없지만 네가 죽는 것도 보고싶다는 지민이지만 한켠으로는 함께 늙어가고 싶은 마음이 은연중에 깔려있다고 생각합니다. 공주는 그때의 시간을 기억하지만 아마 석진에대한 것은 잊은 듯 합니다. 어린 시절에 잠깐 본 거라 잊었을 수도 있고, 어른들도 쉬쉬하니 어린 마음에 떠올리지 않으려 해 잊어버린 걸 수도 있고요. 평안하다. 그건 궁주 자신이 아니라 궁주가 본 석진의 지금 얼굴이겠지요.

항상 좋은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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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내용:https://twitter.com/jin_doing/status/817194852831985664


*괜한 노파심과 오지랖으로 드리는 말씀이지만 패전국 썰의 태형이 얘기를 하실땐 꼭 태친왕 혹은 왕야라고 해주세요.





태형x석진x지민

패전국







태형은 그 뒤로 석진을 찾아오지 않았음. 석진은 태형에게 편지라도 써서 자신과 지민을 오해라고, 그것이 아니라 하고 싶었지만 지민의 말마따나 마냥 아무일도 없던 것은 아닌지라 그럴 수도 없었음. 그리고 그 이후로 지민의 발길도 뜸했고, 석진은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음. 홀로 보내는 시간은 온전히 석진이 자신과 태형, 그리고 지민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게 했음.


석진이 도달한 결론은 태형에게는 말하지 않는게 좋겠다였음. 이미 지민에게 지민의 애나 다름이 없다 말했는데 여기에 태형을 끌어들인다면 결과는 불보듯 뻔했음. 석진은 이것이 태형을 지키는 방법이라 생각했고 그렇게 모르는 척 했음.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처음엔 힘들었지만 석진은 아무도 찾지 않는 화청전이 익숙해져 갔음. 석진은 태형의 어머니의 처소였던 화청전에서 두 사람의 흔적을 찾으며 시간과 외로움을 지워내고 있었음. 서재 한 켠에는 어릴 적 태형이 적어놓은 듯한 낙서가 적힌 책들을 찾을 수 있었고, 태형이 연습을 하며 써내려간 글씨나 그림들을 보며 석진은 저 혼자 마음을 이어갔음. 



석진은 그날따라 밤새 태형의 붓글씨를 따라쓰며 밤을 새웠음. 글쓰기 연습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지민이 석진의 뒤에 서 붓을 잡은 손 위에 제 손을 겹칠 때까지 알아채지 못했음. 헉, 하고 옆을 보니 지민이 석진의 손을 잡은 채로 글씨를 써내려갔음.



"짐은 이렇게 쓴다."

"…….."



하지만 석진은 지민이에게 예를 올리고 다시 태형의 글씨체로 글씨를 써내려갔음. 지민은 옆에 앉아 턱을 괸 채로 석진을 올려다 볼 뿐이었음.



"내일이면 태친왕이 네 나라로 떠난다."

"……."

"옛 정을 생각해 보러가지도 않을테냐."

"…가지 않습니다."

"네 얼굴은 벌써부터 보고싶다 하면서."




석진은 대답하지 않았음. 그저 종이를 걷어내 새로운 종이를 꺼낼 뿐이었음. 석진은 지민이 제 아이를 원한다고 생각했음. 그 이유밖에 없다 여겼음. 지민은 지금 정복전쟁을 하러가는 것이고, 그럼 그 나라 사람인 석진과 황족 사이의 아이는 후에 징검다리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것일테니까. 물론 모두 지민의 장기 말일 테지만….




"황상."

"말해보거라."

"태친왕께서 무사히 승전보를 가져오신다면…."

"……."

"저를 여기서 내보내 주세요."

"…아이는?"

"…황상의 아이가 아니십니까."

"내 아이라."

"그리 원하시어, 대답을 받아 가신 것이 아니십니까?"

"나는 내 아이를 원한 적이 없다."

"……."

"너와 짐의 아이를 원한 것이지."



지민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화청전을 나가려는 듯 문 앞에 섰음.



"만약 태친왕이 패전보를 가져왔을때는 어찌하겠느냐."

"…그때는 저를 죽이시고 태친왕을 대장군 자리에서 파면시켜 주십시오."



석진은 지민에게 말이 파면이지, 태형을 이제 놔달라는 뜻으로 말했음. 지민의 석진의 대답에 의외라는 얼굴로 흥미로워했음.




"마치 네가 10만 군사의 목숨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구나."

"……."

"생각은 해보겠다."





지민이 화청전을 나섰고 석진은 무너지듯 주저앉았음. 대담한 척 말했지만 황제를 상대로 목숨을 담보로 내기를 한 것이었으니까. 석진은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음. 그리고 그대로 기억을 잃은 것처럼 잠들었음.


다시 잠에서 깬 것은 새벽 햇살이 눈을 간지러 필 때였음. 누구, 하고 살며시 눈을 떴는데 침대 맞은편 책상에 서있는 모습이 보였음. 태형이었음. 태형은 석진이 최근 계속 연습했던 글씨를 보고 있는 듯했음. 그 글씨체는 자신의 것이었음. 당장이라도 달려가 등을 안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음. 석진은 다시 눈을 감았음. 곧 침대 한쪽이 내려갔음.




"이제는 이 곳이 편한가 보구나. 이리 깊게도 잠들고."

"……."

"나는 너를 처음 만났던 곳으로 돌아가는데 너는 이 곳에 남겠구나."

"……."

"이제 이 황궁에도 꽃이 피지 않은 곳이 없더구나. 이즈음이면 너와 가고 싶었던 곳이 있었는데…."

"……."

"북쪽으로 꼬박 이틀을 가면 내 어머니의 고향이 있는데, 아주 고요한 성이지. 이맘때면 그곳에서 봄을 즐기곤 했는데…. 그것이 너무 아쉽구나."




태형이 석진의 머리칼을 매만졌음.





"진아."

"……."

"네 잘못은 아무 것도 없어. 모두 내가 시작한 것이었고, 내가 너를 끌어들인 것이다. 모두 내 잘못이야."




태형의 말에 석진은 그만 눈물이 왈칵 쏟아졌지만 감은 눈을 뜨지는 않았음.




"무슨 꿈을 꾸기에 이리 우는 것이야."

"……."

"울지말아라… 울지말아…."




태형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곧 방안 가득 향이 퍼졌음. 아마 향초를 킨 모양인데 마음이 편안해지면서도 점점 몽롱해져가는 기분이었음.




"푹 자고 일어나면 모든 걸 잊고 살아가줬음 좋겠다."

"……."

"내가 다 가져갈테니…."




태형은 말하고 있었지만 석진은 목소리는 들릴 뿐 뭐라 하는지 들리지 않았음. 그리고 입술에 태형의 입술이 맞닿았음. 길었지만, 질척이지는 않았음.




"---."




태형이 방을 나섰고 석진은 꿈결에도 눈물을 뚝뚝 흘렸음.





#




전쟁은 순조로웠음. 애초에 약소국인나라였고, 이미 속국인 나라를 정복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음. 세 달은 예상했던 일이 두 달만에 끝났고 전쟁은 막바지에 접어 들었음. 전쟁이 끝나갈수록 석진의 배도 불러 이제 다들 새 황손을 맞을 일로 분주했음. 


석진은 그 날 밤, 통증에 시종을 불렀음. 진통을 느껴서였음. 석진은 남자 오메가였기에 배를 갈라 아이를 꺼내야했음. 어의들과 시종들이 그 준비를 했고 서재에서 그 소식을 들은 지민은 한 치의 소홀함이 없이하라는 명을 내렸음. 시간은 꼬박 해가 다시 뜨고 새벽이 와서야 아이의 울음소리가 화청전에 울렸음. 석진은 아이를 안아보지도 못하고 마취에서 깨어나고는 다시 혼절했음.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에 서재에 있던 지민이 화청전으로 발길을 옮겼음. 그때 내관 한명이 다급하게 뛰어와 지민의 앞에 엎드렸음.




"황상, 전장으로부터 연통이 왔사옵니다."

"…무슨 일인데 이리 경거망동하느냐."




지민의 말에 내관은 몸을 떨었으나 이내 숨을 고르며 말을 이어갔음.




"다름이 아니오라 태친왕이…."

"……."

"…사망했다 하옵니다."




순간 바람이 불어 지민의 용포가 바람을 따라 휘날렸음.




"다 이긴 전쟁이 아니더냐."

"전쟁 중 사망한 것이 아니오라, 술잔에 독이…."

"타살인가?"

"아니옵니다. 이것을…."




내관이 품에서 봉투를 꺼내 지민에게 바쳤음. 봉투의 겉에는 황상이라는 글씨가 적혀있었음. 자신에대한 원망이 적혀있는 것일까, 지민은 천천히 그 봉투를 뜯었음. 그러나 안에는 편지따위는 들어있지 않았음.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것처럼 얇은 봉투를 들추자 귀걸이 한 짝이 구르듯 지민의 손바닥에 떨어졌음. 지민은 눈을 가늘게 떴고 마침 아이의 울음소리가 더 크게 울렸음. 그것이 태형의 대답이었음.





#




석진이 기력을 회복한 것은 전쟁이 끝나고 일주일 후의 일이었음. 의식을 찾았다 까무러치기를 반복하던 석진은 그제서야 제 아이를 품에 안아볼 수 있었음. 아이는 태어난 지 얼마되지도 않았지만 누가봐도 태형의 아이임을 알 수 있었음. 태형의 이목구비를 그대로 닮은 아이는 분명 태형과 저의 아이인 홍윤이었음. 석진은 윤이의 이름을 속으로 되뇌었음.



이제 태형이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음. 애초에 석진은 오로지 아이를 위해 태형의 곁으로 간 것이었음. 자신처럼 길바닥에서 태어나 길바닥 인생을 살게하고싶지 않았기에.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제 아이는 왕부의 왕자가 아닌 황궁의 황자로 살아갈 것이었음. 오히려 출신이 낮은 자신은 아이의 앞길에 방해만 될 뿐이고, 자신은 이 나라를 홀로 떠날 생각이었음. 



석진은 기력이 회복하자마자 전쟁은 어떻게 됐냐 물었음. 다행히도 전쟁은 승리했고 석진은 안도했음. 홀로 남을 태형이 걱정됐지만 왕의 승은을 입었다 공표된 자신이 태형의 곁에 남는 것도 태형에게 위험할 것이라 생각했음. 석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에서 홍윤도, 자신도 아닌 태형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일이었음.



너무 누워만 있었더니 몸이 뻐근해 석진은 천천히 처소의 화원을 걸었음. 어느새 황궁에도 꽃이 만발해있었음. 태친왕부도 그렇겠지, 하며 석진은 황궁의 화원에서 태친왕부를 떠올렸음. 이렇게까지 화려하진 않았지만 오히려 그곳이 더 그리웠음. 그런데 저 멀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음. 아직 누군가의 제례를 드릴 때가 아니었기에 의아한 석진은 자신의 시종을 불렀음.




"저 연기가 무슨 연기입니까."

"오늘이 삼우제라 그러하옵니다. 원래는 진작 장례를 치뤘어야했는데 황상께서 전쟁이 끝나고 황궁에서 치루자 하셔, 날이 미뤄졌습니다."

"…장례?"




누구의 장례길래, 전쟁이 끝나고 황궁에서 치루는 걸까. 한낱 병사의 장례일 리가 없었음. 석진은 입술을 달싹일 뿐 그 이름을 내뱉을 수가 없었음.




"누구의…"

"아뢰옵니다. 태친왕의 삼우제이옵니다."

"……."





#




석진은 그대로 기절해버렸음. 다시 눈 떴을 때는 익숙한 천장이 보였음. 저 천장이 익숙해지다니, 석진은 스스로를 비웃었음. 너무 어지러워 물이 마시고싶어 석진은 시종을 불렀음. 그런데 석진의 곁에 온 시종은 항상 함께 하던 그 시종이 아니었음.




태형이 석진을 보러 오지 않은 것은, 않은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었음. 아직도 창문 너머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음. 석진은 그곳으로 차마 가지 못했음. 자신은 태형에게 어떠한 의미도 갖고있지 못했음. 두 사람을 이어주던 유일한 것은 홍윤이었는데, 홍윤은 지민의 아이로서 태어났기에, 또 이 궁에서도 어떠한 지위도 없는 석진은 저 곳에 갈 수도 없었음. 그저 창가에 피어오르는 연기를 지켜보는 것이 다였음. 지금의 석진에게는 태형의 이름조차 꺼내는 것조차 죄악처럼 느껴졌음.




다시 해가 지고 밤이 되자 지민이 화청전에 들렀음. 두 사람은 아무런 대화를 하지 않았음. 석진은 어떠한 예도 올리지 않았음. 마치 지민이 온 걸 모르는 사람처럼 창문 밖만 바라보고 있었음. 지민은 입궁했을 때의 첫 날처럼, 석진의 어깨에 담요를 덮어주었음. 그러나 어떠한 미동도 없는 석진때문에 담요는 바닥에 툭하고 떨어졌음.




"감추려 했던 것은 아니야. 다만 네 몸 상태가 좋아지면 말해주려 했다."

"……."




지민이 한숨을 푹 쉬었고 석진은 홀린 사람처럼 창 가에 앉아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음. 떨어진 담요와 손. 지민은 화청전을 나가지 않고 그런 석진을 바라보며 석진의 침대에 누웠음. 석진이 고개를 돌린 것은 지민이 곤히 잠든 숨소리가 들렸을 때였음. 그리고 석진은 서랍 안에서 작은 단도를 꺼내들었음.




단도를 든 석진은 자신의 침대에 누워 잠든 지민을 내려다 보았음. 단도는 석진에 의해 높이 들렸다 지민의 목젖 위에서 멈췄음. 단도를 든 석진의 손이 덜덜 떨렸음. 석진은 단도를 든 채로 그대로 뒤를 돌았음. 이제 말라 흐르지 않을 것 같은 눈물이 볼을 따라 흘렀음. 아무래도 오늘 밤은 이 곳에 있지 못할 것 같았음. 석진은 단도를 든 채로 소매로 눈을 비볐음.



그러나 나가려하는 석진을 뒤에서 지민이 허리를 낚아챘음. 석진은 너무 놀라 숨을 헐떡이며 지민을 내려다 봤음. 지민은 석진을 자신의 위로 당겨 그 허리를 단단하게 안았음. 둘은 어떠한 대답도 물음도 없이 서로의 시선을 공유했음. 지민의 다른 손이 단도를 잡은 석진의 손을 겹쳐 잡았음. 그리고 손을 당겨 자신의 복부에 가져갔고 석진은 그런 지민의 손을 한번, 지민의 얼굴을 한번 번갈아 바라보았음.



"사람을 찌르는 건 의외로 강단이 필요해. 얇은 칼 끝으로 피부를 가르고 그 아래 근육을 잘라, 장기를 꿰뚫어야하니까."

"……."

"그리고 한 번에 급소를 찔러야지."

"……."



지민이 손을 빼려는 석진의 입술에 입을 맞췄음. 가는 혀 끝은 입술을 가르고 석진의 혀를 얽매어왔음. 그리고 여전히 입술을 맞댄 채로 지민이 말했음.



"여기야."



그리고 석진이 쥔 단도가, 지민의 손에 의해 지민의 복부를 찔렀음. 단도는 깊이 들어가 지민의 복부에 박혔고 그제서야 잡고있던 손이 풀렸음. 석진의 손에는 지민의 피가 묻어 뚝뚝 떨어졌음. 지민의 배로 피가 울컥이며 흘러나왔음. 석진은 그런 지민의 복부를 천으로 감싸며 태의를 불러오라며 소리 쳤음. 곧 태의가 방에 들어섰고 지민은 복부를 감싸고 있는 석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음. 그리고 곧 정신을 잃었음.





#




지민이 정신을 차린 것은 닷새가 지난 후였음. 급소였지만 다행히 찌르는 힘이 약해 근육만 다쳤을 뿐이라 태의는 말했음. 지민은 눈을 뜨자마자 석진을 물었음. 내관은 지금 황제 시해자로 처소에 감금돼있다 답했음. 지민은 아직 몸을 일으켰음. 상처가 덜 아물어 윽, 하고 미간을 찌푸렸지만 주위의 만류에도 지민은 화청전으로 향했음. 화청전은 냉궁처럼 차가웠음. 지민은 시종에게 일러 아직 날이 추우니 어서 불을 때라 명했음.




석진은 침대도 아닌 바닥에 앉아 있었음. 물 한모금 마시지 않은 것인지 입술이 말라있었음. 지민은 석진의 앞에 다가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음. 그러나 석진은 지민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로 지민의 손을 쳐냈음. 지민은 석진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았음. 그리고 석진의 오른쪽 귀에 손을 가져갔음. 이번엔 석진이 지민을 쳐내지 않았음. 지민은 제가 달아줬던 귀걸이를 빼냈음. 그리고 품에서 태형이 보내줬던 귀걸이의 한 짝, 석진의 왼쪽 귀걸이와 같은 모양새의 귀걸이를 꺼내 걸어주었음.



"이게 그의 답이었다."

"……."



지민은 제가 주었던 귀걸이를 책상에 올려두고는 화청전을 나왔음. 그리고 화청전의 모든 시종과 시위를 물렸음.




#

 


 한밤중에 내관 한명이 서재에 있는 지민에게 황급히 달려왔음. 지민은 닷새 동안의 부재로 인해 밀린 업무를 보는데 한창이었음. 그 내관은 지민이 석진에게 붙여둔 내관이었음.



"황상. 지금 화청전주(主)가 황궁을 떠나려는 듯 보입니다."

"…아이는?"

"함께이옵니다."

"……."



지민이 읽고있던 상소문을 덮었음.




"이 일을 누가 또 아느냐."

"황상께서 화청전의 종들을 모두 물리시어 아는 사람은 신 밖에 없사옵니다."

"지금 짐과 너만 안다는 이야기구나."

"그러하옵니다. 바로 황상께 달려왔사옵니다."



지민이 대전내관을 불러 뭐라 귓속말을 하니 곧 대전내관이 그에게 차를 한잔 내렸음.



"급히 뛰어오느라 숨이 찰텐데 마시거라."

"황상, 그러나 지금 빨리 가 잡지않으면 황궁을 벗어날 것이옵니다."

"어서 마시라하지 않았느냐."



지민의 목에 힘이 들어가자 내관은 조용히 그 찻잔을 들이켰음. 그리고 곧 찻잔이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고 그 내관 또한 그대로 쓰러졌음. 대전내관이 시종을 시켜 그 내관을 들고 나가게 했음. 지민은 다시 상소문을 들여다보았음.


황궁을 빠져나가는 석진은 망토를 뒤집어써 얼굴을 가렸는데, 이상하리만큼 그 누구도 석진을 잡지않았음. 수월하게 궁을 빠져나온 석진은 북쪽으로 향했음. 팔 안에는 태형과의 아이인 홍윤이 잠들어 있었고 품 안에는 지민의 귀걸이가 들어 있었음. 밤 하늘에는 달이 한아름 떠 두 사람을 밝히고 있었음.  





"어찌 하시겠습니까."



대전내관이 지민에게 조심스레 물었고 지민은 피곤한듯 상소문을 접으며 두 눈을 지그시 감았음.



"짐은 아무 것도 듣지 못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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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태가 이상했다.


평소라면 석진의 발걸음 소리에 뛰어 나와 꼬리를 흔들었을텐데 아무리 불러도 침대 밑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석진이 손을 넣어서 앞 발을 잡아당겨도 끼잉 끼잉하며 꼼짝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자 석진은 병원을 데려가기로 결정했다. 태태는 오늘도 석진의 침대 밑에 있었다. 나오지 않겠다는 애를 가까스로 어르고 달래 차에 태워 병원에 왔다.


병원이란건 어떻게 알았는지 힘을 준 채로 차에서 내리기를 거부하는 태태를 겨우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직 진료는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석진은 이미 진이 빠졌다. 어디가 크게 아픈걸까. 석진은 초조함에 아래 입술을 깨물었다.






"발정기네요."

"네?"

"중성화 날짜 잡죠."






수의사 선생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태태가 진료실을 도망쳤다.








학원강사와 학원생의 주종관계







마냥 아기인줄 알았던 태태가 발정기라니. 석진은 당황스러웠지만 내 새끼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 생각하니 뿌듯했다. 중성화 수술 날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자 한시름 놓이는 듯 했다. 어디 크게 아픈 줄 알았는데, 다행이다. 하지만 석진과 달리 태태는 병원에서 다녀온 이후로 식음을 전폐했다. 병원에서 중성화수술까지 잘 먹이라고 했는데! 태태는 화식에 생식에 수제간식까지 거부했다. 대체 뭐가 문제야.. 석진은 그렇게 잘 먹던 태태가 도통 먹지 못하니 제가 먹지 못하는 것처럼 속이 상했다.


석진은 학원 쌤을 통해 최고 기호성을 보인다는 강아지 간식을 구할 수 있었다. 수입이 막힌 이후로 직구가 아니면 힘들었는데. 기말고사도 끝나고 한가해져 석진은 오랜만에 집에 일찍가기로 맘 먹었다. 저녁 수업이 취소된 것도 있었고 빨리 태태에게 간식을 전해주고 싶었다. 석진은 부드럽게 엑셀을 밟아 제 오피스텔에 들어섰다. 평소처럼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는데, 석진의 시선이 LED창에 멈춰 섰다. 엘리베이터가 석진이 사는 층에 멈춰 있었다.






"……."






한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각 층에는 두 호수 밖에 없었고 석진의 앞 집은 비어 있었다. 무언가 꺼림찍했지만... 석진은 일단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층 수가 올라갈 수록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심장이 뛰었다. 엘리베이터는 금세 멈춰 섰고 자동문이 열리는 때 였다. 띠리링하는 소리가 들렸다. 석진의 현관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였다. 그리고 현관문이 닫혔다. 석진은 큰 눈을 껌뻑이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수 없었다. 112를 눌러야 하나. 그런데 상대는 석진이 아는 사람이었다.


너무나도 잘 아는, 아까까지만해도 얼굴 맞댔던, 학원생인 김태형이었다.








#








석진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비밀번호를 눌렀다. 태형은 도어락 키를 갖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두렵거나,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단 제 집으로 들어가 태형에게 묻는게 우선이었다. 현관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닫혔다.






"김태형!"






석진은 신발 벗는 것도 잊은 채로 집안으로 들어와 태형의 이름을 불렀다. 14평 정도의 작은 투룸에 태형이 숨을 곳은 없었다. 그런데 없었다. 굳게 닫힌 베란다 문을 열어 보일러 실까지 열어보아도 아무데도 없었다. 내가 헛 것을 봤나? 그럴리가. 석진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상했다. 집이 너무나 조용했다. 석진은 몸을 숙여 침대 아래를 보았다. 태태가 있었다.






"태태야, 누가 오지 않았어?"






평소라면 침대 밖으로는 나오진 않아도 낑낑대며 저를 반길 태태가 눈치라도 보는 듯 했다. 평소라면, 석진도 그냥 일어섰을 것이다. 그런데 태태가 깔고 앉아 있는 옷이 어딘가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석진은 팔을 뻗어 그 옷을 잡았다. 비켜봐, 하고 태태와 한참을 씨름하고 옷을 잡아 뺄 수 있었다. 너무나도 익숙했고, 낯설었다. 그 옷은 여기에 있으면 안되는 옷이었다.


김태형

태형의 이름 석자가 새겨진 교복이었다.


석진은 그 교복을 손에 든 채로 욕실의 커텐을 열어 욕조 안은 물론 세탁기 안, 옷장 하나 하나를 열었다. 혹시나 하고 침대 이불도 당겼지만 어디에도 태형은 없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석진은 거실의 소파에 풀썩 앉아 고개를 젖힌 채로 태형의 교복을 들어 보았다. 분명 태형이 들어왔고 태형의 교복이 있는데 대체 어디로 사라진거지. 하아, 석진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교복을 내렸을 때, 석진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아악!"

"쌔, 쌤! 일단 진정하ㅅ…"






자신이 이렇게 하이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지는 석진도 처음 알았다. 태형은 제 침대방에서 침대 시트로 아래만 가린 채로 걸어오고 있었다. 저 방에는 침대와 붙박이 장만 있었다. 아까도 봤지만 절대 태형이 숨어 있을 곳이 없었고, 없었다. 그런데 대체 어디에? 어떻게? 아니 그게 중요한게 아니다. 석진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목이 쉬는 것도 잊은 채 비명을 질렀다. 태형의 머리에 긴 귀가 있었다. 그러니까, 강아지의 귀와 같았다. 아니 그러니까! 그 귀는 태태의 것과 똑같았다.







"쌤, 제가 다 설명할게요. 그러니까 이게요.."






제 집을 침입한 알몸의 강아지 귀의 남자.

석진은 부엌으로 달려가 두께가 두꺼운 주물 후라이팬을 꺼내 들었다.






"아, 쌤! 쌤!!"

"이 변태새끼야!!!"






석진은 휘둘렀고, 태형은 기절했다.








#







태형이 아는 석진의 귀가시간은 9시였다. 항상 자신의 수업이 끝나고 한 시간 정도 뒤에나 오는 석진이었다. 태형은 여유롭게 피시방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때 휴대폰이 시끄럽게 알람을 연속으로 울어댔다. 지민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같은 메시지가 열 통, 스무 통 반복해서 울렸다. 읽을 때까지 백 통이라도 보낼 기세였다. 


[비상사태 석진쌤 퇴근함]


제가 알기로 석진의 수업은 아직 두 타임이나 더 남아 있었다. 그런데 퇴근이라니. 태형은 파티원들에게 욕을 먹으며 급히 하고 있던 오버워치를 로그아웃하고 책가방을 들쳐 맨 채로 택시를 잡았다. 아이, 망했다. 석진보다 먼저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허겁지겁 도착한 집에는 다행히 아직 석진이 없었다.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는 그때였다.


문이 열렸다. 태태의 모습으로 침대 아래에 숨어있던 태형은 미친 사람처럼 제 이름을 부르며 쥐잡듯 집안을 뒤지는 석진에 머리를 굴렸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래, 이미 다 들켰는데 나가서 설명하자. 설명하면 될 거야! 태형은 침대 아래서 기어 나왔다. 제 옷은 석진이 들고 갔으니 태형은 어쩔 수 없이 침대 시트로 몸을 가렸다. 언젠가는 설명해야 했지만 태형이 생각한 것은 이런 그림이 아니었다. 후.. 하고 깊은 숨을 내쉬며 태형은 방을 나섰다.


그리고 기절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누군가 제 귀를 잡아 당기는 느낌에서였다. 아파요.. 하고 나지막히 말하는데 목이 뻐근했다. 아… 아무리 반은 개라지만 사람 모습일 때 목줄이라니.






"이거 뭐야."






눈을 떴을 때 석진이 짜증 가득한 얼굴로 태형을 보고 있었다. 태형이 그런 석진을 빤히 바라보자 석진이 태형의 귀를 세게 잡아 당겼다. 석진은 태형이 강아지 귀 머리띠를 한 줄 알았다. 전라에 동물 귀 머리띠. 석진이 알기로 그런 모양새는 변태밖에 없었다. 기절한 태형을 끌고 와 혹시 몰라 목줄을 매어 침대 헤드에 묶었다. 얌전히 태형이 묶이자 (애초에 기절해 있었다.) 어느정도 진정이 된 석진은 그제서야 정상적인 사고가 되는 듯 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태태가 안보였다. 태태가 사라지고 나타난 강아지 귀의 태형. 석진은 일단 이 머리띠부터 벗겨야겠다 하고 잡아 당기는데, 전혀 벗겨지지 않았다. 아니, 이건 가짜가 아니였다. 따뜻했고, 안에 귓바퀴도 있었다. 태태의 귀청소를 해줄 때 봤던 그 귀였다. 석진은 멍하니 태형의 귀를 잡아 당겼다. 세상에, 석진은 이대로 기절하고 싶어졌다. 설마, 설마 하는 생각이 자꾸만 머리 속에 맴돌았다. 말도 안 돼, 설마. 이게 뭐 란마1/2이야?






"이거, 뭐냐고."

"아, 아파요! 귀, 귀 잖아요!"

"이게 왜 달려있어."

"…그게요. 숨겨야하는데 너무 갑작스러워서…"

"아니, 그전에 너가 왜 우리집에 있어?"

"…그러니까."

"그것보다 왜 다 벗고 있어? 남의 집에?"

"…어…"

"태태는 어디갔고!"






석진의 물음에 우물쭈물하던 태형이 저를 가르켰다.






"여기요."






태형의 말에 석진은 아까의 후라이팬을 높게 들었다.






"아니 이새끼가 이 상황에 지금.."

"제가 태태 맞아요!"

"……."

"여, 여기엔 사정이 있어요, 쌤!"






후라이팬이 휘둘러 졌다.






"치, 침대 아래에 핑크 딜도!"






후라이팬이 태형의 코 앞에서 멈춰섰다.






"침대 아래 박스에 핑크 딜도 있잖아요?"

"…너가 그걸 어떻게 알아."

"봤으니까요."

"아, 아니 그건 내 꺼가 아니라…"

"나, 다 봤는데."

"…뭘?"






석진은 말하고 후회했다. 되묻지 말고 잡아떼야 했는데. 아니, 한편으론 확실히 하고 싶었다. 설마, 아닐 거야. 묻는 석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쌤이 그 때, 방에서 나 내보냈잖아요. 근데 문은 안 닫았고."






석진의 손에 든 후라이팬이 힘없이 떨어지자 태형이 그제서야 씩하고 웃었다.








"쌤이 혼자 하는 거 다 봤다구요."

"……."

"아, 젤은 이 서랍에 들어있죠."

"……."

"2단으로는 못 느낀다면서 3단까지 올렸잖아요."

"……."






석진은 태형의 말에 망연자실했고, 말도 안 되는 현실에 기절하고 싶었다.






"와, 나 참느라 죽는 줄."






아니, 당장 접싯물에 코를 박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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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진은 지금 세상에서 누구보다 진지했다. 


모두가 퇴근 준비중인 교무실에 가장 진지한 얼굴로 노트북을 노려보고 있었다.'석진쌤 요새 고민있으시대?' '몰라.' 주위의 선생님들이 수근거려도 석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열심히 마우스 휠을 내렸다. 석진이 한숨을 푹 쉬자 방탄보습학원 교무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무언가 큰일이 있으신 게 틀림없어. 다들 위로의 시선을 던지며 교무실을 떠났다.



'오리젠 퍼피랑 나우 퍼피 중에 뭘 사지..'



세상 모든 고민 다 짊어진 얼굴을 한 석진의 노트북 화면에는 강아지 사료가 가득했다.








학원강사와 학원생의 주종관계





석진이 강아지를 주운 것은 한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날은 유독 비가 많이 내렸다. 한동안 습하고 뜨거웠던 날씨가 한풀 꺾이는 듯했다. 석진은 창 밖 요란한 빗소리를 들으며 아.. 빨래 괜히 널고 왔네.. 하고 낮에 널고 온 빨래를 생각했다. 퇴근 준비로 분주한 교무실에서 석진만 멍하니 턱을 괴고 있었다.



"선생님! 밖에 강아지가 묶여 있어요!"



모두 퇴근 준비를 하던 와중에 물에 빠진 생쥐마냥 흠뻑 젖은 지민이 강아지 한마리를 안고는 교무실로 들어왔다. 석진은 그저 힐끔 시선을 두고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다시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머나, 웬 강아지야."

"학원 앞에 묶여있는데 아무리 있어도 주인이 안 나타나요."

"세상에.. 누가 버리고 갔나보네."



다들 한마디씩 덧붙였지만 그때도 석진은 다시 돌려야 할 빨래를 걱정하고 있었다. 본가에 있는 짱구 외에는 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석진이었고 지금은 흠뻑 젖은 저 강아지 마냥 이 폭우 속에 젖어있을 빨래가 제일 걱정이었다. 또 빨래를 돌려야하나, 하는 생각에 석진만 창 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석진쌤이 데려가면 되겠다!"

"..어?"



가방을 들고 제일 먼저 교무실이 나서던 석진이 지민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선생님과 학생들도 그러면 되겠다~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뭔가 나를 빼고 내 일이 결정된 것 같은데..



"나? 나보고 데려가라고?"

"네!"



지민이 석진의 앞에 안고 있던 강아지를 들이대며 환하게 웃었다. 석진은 얼떨결에 품에 강아지를 안아 들었다. 강아지.. 였지만 강아지라기엔 이미 크기가 짱구보다도 컸다. 게다가 흠뻑 젖어 버림받은 주제에 뭐가 신나는지 얼굴은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왜?"

"헐.. 쌤.. 지금 강아지가 주인한테 버림받아 폭우 속에 떨고 있는데.." 



석진은 아니 내 집에 데려가는 걸 왜 나를 빼고 결정해! 하고 소리치고 싶지만 이미 뱉은 한마디에 다들 석진을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안처럼 쳐다봤다. 아니, 내가, 뭐, 대체, 뭐.



"우리집은 안돼요.. 애완동물 금지라서.."

"저도. 게다가 애들도 있고."

"저도 엄마한테 혼나요!"

"그러니까 석진 쌤♡"






지민아 선생님 눈 보고 다시 얘기해보자.




#




떠맡기듯 데려온 강아지는 석진이 혼자 지내는 오피스텔이 꽉차게 느껴지게 했다. 아직은 어려서 괜찮지만 곧 성견이 되면 이 오피스텔에서 키우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았다. 일단은 임보하는걸로 하고 주인을 찾아줘야겠다.. 하고 석진은 드라이기로 흠뻑 젖은 강아지를 말리며 생각했다.



"그래도 이름은 지어줄까.."



석진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건지 석진의 무릎에 얌전히 앉아있던 강아지가 고개를 들며 눈을 반짝였다.



"율무?"

"...."



진짜 알아듣나. 부른 이름이 맘에 안드는지 강아지는 아우우, 하고 작게 하울링하며 고개를 숙였다. 석진은 그 이후로도 침침, 또순이, 호비, 모니, 순심이 등 여러 이름을 불렀지만 반응은 없었다.



"어.. 태태?"



이 세상에 있는 온갖 이름과 애칭을 말하던 석진이 학원에서 제일 똥꼬발랄한 강아지같은 학생인 태형을 떠올리며 꺼냈다. 이름은 김태형인데 석진을 제외한 모두가 태태라고 불렀다. 이것도 아니면 그냥 똥개라고 부르리라. 하고 마음 먹고 부른 이름이었는데 그제서야 강아지는 고개를 들며 저를 쳐다봤다.



"태태? 태태야?"



정말 맘에 든 건지, 아님 원래 이름이 태태였던 건지 태태가 석진의 얼굴을 핥아왔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는 게 이런 것일까. 하루종일 소파에 누워 맥주 한캔하는 게 유일한 낙이었던 석진의 일상에 태태는 금새 스며들었다. 잠깐 임보한다던 석진이었지만 애교 많은 태태는 어느새 석진의 애완견이 된 지 오래였다. 석진은 하루 종일 태태의 간식, 장난감 사이트를 눈팅했고 요즘은 아예 사료를 떠나서 화식, 생식으로 갈아타 번거롭지만 매일 태태의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태태야, 아빠 왔어!"




석진의 목소리가 들리자 석진의 침대방에 있던 태태가 달려 나와 석진을 반겼다.



"아이구~ 집에 혼자 있었어~ 혼자 심심했어~ 우리 태태. 아빠가 간식 사왔지!"



석진은 저에게 배를 깐 태태를 쓰다듬고 안았다. 이제 한품에 안기엔 조금 버거웠지만 태태는 석진에게 안기는 것을 제일 좋아했다. 총명한 태태는 쓰담쓰담? 이라는 단어만 꺼내면 바로 석진의 옆으로 다가와 만져달라며 머리를 들이댔다.


애교는 어찌나 많고 사람을 어찌나 따르는지 데려온 첫날 따로 거실에서 재우려 하자 하도 낑낑대서 결국 태태는 석진의 침대도 차지했다. 이렇게 예쁜 애를 대체 누가 버린거지. 학원에서는 그렇게 차갑던 석진이 이렇게 팔불출이 될 줄은 학원 선생님도, 학원생도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





어느새 날은 무더워져 학교는 방학에 들어갔고 석진의 학원 또한 잠깐의 방학을 가졌다. 오랜만에 휴가에 다들 어디 놀러가네 저기 놀러가네 했지만 석진은 집에서 에어컨 틀고 맥주 한잔하며 영화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태태를 두고 본가도 못가는 와중에 멀리 여행가는 건 지금의 석진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태태야, 오늘 아빠 친구 올꺼야. 그러니까 얌전히 있자. 알았지?"



폭염에 에어컨 아래에 누워있던 석진은 제 옆에 있는 태태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석진은 오랜만에 휴가에 친한 동생인 윤기를 집으로 초대했다. 




[윤기야 형 집에 와라]

[왜요]

[형 집에 강아지 있어]

[근데 왜요]

[형이랑 영화보자]

[제가 왜요]

[오리고기 콜?]

[콜]



초대라기보단 와달라고 구걸했다는 쪽이 가까웠지만... 석진이 오리고기를 꺼내 요리하기 시작하자 태태는 제 것인 줄 알고 옆에 앉아 꼬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안돼. 이건 태태꺼 아니구 아빠랑 친구 거야."



요새 석진이 느낀거지만 태태는 천재가 틀림이 없다. 지금도 제 것이 아니라니까 금새 꼬리를 내리고 귀를 추욱 내렸다. 그리고는 터벅 터벅 석진의 침대 방으로 들어갔다. 석진은 조금 미안해졌지만 띵동하고 눌리는 초인종 소리에 현관으로 몸을 돌렸다.



"왔어?"

"여기 맥주요."

"이야~ 민윤기.."



석진이 문을 열자 반짝이는 금발 머리를 한 윤기가 맥주를 보였다. 이 친구 센스봐. 이야~ 하며 석진이 윤기를 집안으로 들였다. 덥지? 하는 말에 윤기는 괜찮아요. 형 집 시원하네. 하고 신발을 벗으며 두리번 거렸다.



"형, 키운다던 강아지는?"

"아~ 태태! 지금 방에 있어. 얘가 원래 사람 오면 반기는데.. 넌 사람이 아닌가봐."

"근데 어디서 타는 냄새 안나요?"

"형의 마음?"



윤기를 반기던 석진은 후라이팬에 올려놓은 오리고기 주물럭을 생각했다. 아, 맞다! 하고는 부엌 쪽으로 달려가 후라이팬을 잡았다. 냉장고에 맥주캔을 넣던 윤기는 방에 들어가 봐도 돼요? 했고 석진은 어. 태태 착해. 안 물어! 하고 오리고기 주물럭에 집중했다. 티는 안냈지만 강아지를 좋아하던 윤기는 기대감에 부풀어 석진의 침대 방문을 열었다. 윤기는 방문을 열었다. 윤기는.. 열었다. 열었는데...





"뭐."



방 안 침대에는 전라의 건장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윤기는 방 안을 한 번, 부엌에 있는 석진을 다시 한 번 번갈아 봤다. 다시 눈을 비비고 방안을 봐도 강아지는커녕 꼬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형.. 애완견이라면서요..



"형 강아지라면서요..?"

"응! 우리 태태가 커보여도 아직 어려! 애기야!"



확실히 침대의 남자는 덩치는 컸지만 아직 앳된 티가 났다. 아직 얼굴에 솜털이 있는게 고등학생 정도로 보였다.



"아.. 어리구나.. 형이 키운다던 애완견이 얘구나..."

"우리 태태가 얼마나 애교가 많은데~ 아주 밤에 잠을 못 자! 놀아주느라 힘들어."





"아.. 그래요.."


고등학생의 어린 애완견. 윤기는 아무리 석진이 친한 형이라지만 그의 성적 취향을 알고 싶지도 않았고 존중하기도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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